월간참여사회 2016년 11월 2016-10-31   1179

[특집] 전문가의 시대,  무엇이 문제인가? 

특집_타락한 전문가들의 사회

 

전문가의 시대, 
무엇이 문제인가? 

 

 

글.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늘 그렇지만, 최근에는 ‘뉴스 보기가 겁난다.’ 건설토목 전문가들에 의해 4대강 사업이 강행된 뒤 22조짜리 녹조 라떼가 나왔고, 회계 전문가들이 수치를 조작해 쌍용차 노동자들을 2,600명 이상 해고하거나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을 조장했으며, 지질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돈으로 경쟁까지 시켜) 활성 단층 위에 원자력 발전소 및 핵 폐기장을 지었다. 또 정보 전문가들에 의해 간첩이 창조되고, 선박 전문가들에 의해 세월호 같은 엉터리 배가 안전 검사를 통과했으며, 노동 전문가라는 자들은 컨설팅을 한답시고 노조 파괴 시나리오를 짜고, 법률 전문가들은 헌법과 노동법을 농락했으며, 군사 전문가들은 분단을 무기 삼아 방산 비리를 저지른다. 또 전문 지식을 가진 교수들이 특정 인사의 자녀에게 특혜를 베풀거나 가습기 살균제 및 치약 등의 유해성을 조작했고, 최고 의료 전문가가 공권력에 의한 백남기 어른의 죽임을 병사로 기만을 해 온 세상을 놀라게 한다. 한 마디로, 나라꼴이 막장이다.

“나라꼴이 이렇게 된 것은 과연 국가권력의 무지몽매한 전횡에만 그 원인이 있을까? 무엇보다 큰 책임은 능동적이든 소극적이든 불의한 권력행사를 음으로 양으로 뒷받침해온 지식인·전문가·과학자들에게 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일갈이다. 평소에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전문가’가 되라고 곧잘 권한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도 ‘전문가’들이 판을 친다. 도대체 전문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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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불구화 하는 전문가 시대
학문적으로는 석·박사를 하고, 실무적으로는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사람을 흔히 전문가라 부른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전문가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런 전문가들이 언론이나 정치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여기서 나는 이반 일리치 선생의 『전문가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이 책은 전문가들이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강화해왔다고 비판한다. 전문가들 앞에 일반인들은 그저 ‘고객’으로 전락하고 국가는 그들의 돈벌이를 돕는 ‘기업’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주체적·협력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자녀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 맡겨야 하고, 몸이 아프면 무조건 병원에 가야하고, 기업 경영의 분석과 평가는 무조건 회계사들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일리치 선생은 전문가의 시대가 ‘인간을 불구화’한다고 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불구자가 되었다. 매일 열심히 살기는 하되,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잘 사는 것인지 모른다. TV에 누가 나와 ‘100세 시대를 살려면 10억을 모아야 한다’고 하면, ‘아, 그런가 보다’하며 노동시장을 찾고 야근과 특근도 마다 않는다. 또 누군가 언론에 나와 ‘이런 학교를 다니고 이런 학원을 다녔더니 성공했다’고 하면 그 학교나 학원으로 몰려간다. 의학 전문 박사가 수술과 치료를 잘 한다고 하면 우르르 몰린다. 시장에 나오는 대부분의 상품들이 실은 전문가들이 고안한 대량 생산의 결과다. 이제 우리는 전문가들의 상품을 사러 앞 다투어 몰려다닐 뿐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도 모르고 더불어 뭔가 만들 줄도 모르는, 삶의 불구자 시대가 곧 전문가 시대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부의 대물림과 트라우마가 만든 전문가 지배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서 전문가들의 지배를 순순히 수용하게 되었는가?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으나 여기서는 세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 전문가들이 가진 지식이나 정보, 기술이나 경험은 곧 권력으로 작용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물론, 지식과 정보, 기술과 경험을 얻는 과정에는 시간과 돈,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의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부모나 조부모의 경제적 도움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대대로 부가 전문성으로 전승되었고 일제 치하와 미군정을 거치면서도 부의 대물림은 공고화되었다. 친일 매판 세력 중에서 재벌이 많이 나왔고, 이들은 독재 권력과 결탁하면서 더욱 강고한 지배 블록을 구축했다. 정치경제적 지배 집단은 늘 지식인이나 과학자, 전문가를 내세워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언론인, 과학자, 교육자, 상담가, 의료인, 기술자, 연구자 등이 가진 권력은 막강하다. 영화 <내부자들>에도 나오듯 언론 권력이 단어 하나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부정부패도 대충 넘어가고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에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손목’이 잘리거나 ‘목숨’도 잃는다. 전문 지식이 곧 총칼과 같은 권력이다.

둘째, 삶의 자율성 상실이다. 예로부터 어른들은 삶 속에서 지혜를 배웠다. (양반 자제 외에는) 별다른 학교 교육이 없어도 오히려 인간됨의 도리는 더 잘 배웠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도구들도 나무 등을 이용해 손수 만들어 썼다. 간장, 된장, 장아찌, 효소, 술 등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어른들이 곧 스승이었다. 또 그들에게는 온갖 산나물과 약초 등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고, 자식들은 그런 지식을 대를 이어 전승했다. 옛날에는 수천 가지를 먹었으나 요즘은 슈퍼에서 10가지 내외만 사다 먹는다. 시골이나 숲 근처엔 먹을거리가 지천인데 갈수록 아는 사람이 없다. 예전엔 아이 하나가 아프면 온 동네 어른들이 걱정하며 나무뿌리나 약초를 구해 와 달여 먹였고, 아이는 곧잘 나았다. 민중이 곧 의사였고, 마을이 곧 복지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축 전문가가 있고 음식·복지 전문가가 있으며 교육·의료·심리 전문가도 따로 있다. 민중의 자율성 상실이 곧 전문가 의존 시대, 결국 전문가 권력을 낳았다. 

셋째, 폭력 시스템이 낳은 ‘못 배운’ 한恨과 트라우마의 결과다. 가난하던 시절, 학식을 갖춘 자들 앞에 민중은 초라했고 움츠러들었다. 잘 모르면서 떠들면 ‘무식하다’며 창피를 당하고 업신여겨졌다. ‘양반 계급’이 일종의 전문가 권력을 휘두를 때, 민중은 이렇게 트라우마를 겪었다. 이런 트라우마가 반복된 결과, 우리는 마침내 전문가 앞에 ‘강자 동일시’를 하고 만다. 한편으로는 강자 앞에 무릎 꿇고 강자를 무조건 섬길 듯 대하면 최소한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라 믿는 것, 다른 편으로는 일단 내가 강자 편이니 나보다 못한 녀석들은 꼼짝 말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며 으스대는 것, 이게 곧 강자 동일시에 기초한 행위다. 일례로, 우리는 경찰이나 판검사 앞에서 벌벌 떤다. 원래는 그들이 우리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데도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강자로 숭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관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다 같은 사람들에 불과하나, 민중은 역사적·사회적 과정에서 어마무시한 폭력 앞에 무기력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두려움에 압도된다. 그 결과, 전문가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아무 죄책감이나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불구의 시대가 왔다.

 

삶의 자율성 회복 절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민중을 불구화하는 ‘전문가’ 맹신부터 벗어야 한다. 나아가 철학 없는 전문가들의 민중 지배를 묵인하지 말고 스스로 나서야 한다. 삶의 자율성 회복이 절실하다. 그래서 마침내 정치경제, 사회문화, 교육언론 등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 독재가 아니라 지혜로운 민초들이 공동 결정하는,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한다. 민초가 나서지 않으면 전문가 독재는 지속된다. 깨어난 민초들의 조직된 힘, 이것이 곧 삶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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