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1월 2005-11-01   844

뒷걸음치는 공공성에 흔들리는 의료체계

한국 의료체계의 특성과 문제

질병은 고통과 불안을 일으킨다.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에 사회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의료체계이다. 의료는 신뢰와 생명우위의 가치관이 바탕이 될 때 제대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료체계는 불신과 이윤 지향적인 구조 위에 서 있기 때문에 환자들은 상당한 불안과 불만을 느끼면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병원을 처음 찾을 때 환자들은 그 병원에서 일하는 아는 사람을 먼저 수소문한다. 아는 의사의 존재는 담당 의료진으로 하여금 환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 환자들은 무조건 ‘큰 병원’을 찾는다. 큰 병원의 혼잡함과 오랜 기다림, 높은 비용을 잘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불안’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의사들은 환자들의 과도한 공포심이나 치료에 대한 과잉기대가 초래한 비합리적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환자로서는 자신의 건강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고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료 현실을 드러내는 ‘3분 진료’

‘3분 진료’는 한국 의료의 현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의료 현장에는 몇 마디의 의례적 문답과 함께 검사와 처방만이 존재한다. 만일 환자의 질병상황이 이와 같이 단순 명료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매우 효율적인 의료체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만성질환은 원인과 경과도 불분명하고 질병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고통도 매우 크다. 환자의 고통이 3분 안에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환자의 욕구와 기대는 불신과 불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3분 진료는 의사들에게는 높은 노동 강도를 의미한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의사들은 환자에게 세심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시술이나 의료사고의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환자들은 이런 상황을 몸으로 느끼고 있고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의료체계 전체로 볼 때도 사정은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약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결과 항생제 내성 문제가 심각하고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슈퍼 박테리아가 나타나고 있다.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제왕절개술과 같이 적정수준을 크게 넘는 수술도 많다. 다른 한편, 산부인과 의원에서 분만을 담당하지 않거나 정형외과에서 수술을 하지 않는 등 의료자원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의료기관끼리 검사결과를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에 환자들은 병원을 옮기게 되면 모든 검사를 다시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작은 병원들은 밤에 약사가 없는 경우도 흔하다. 응급실 근무의사가 아르바이트 의사로 채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열악한 간호기능도 일반화되어 있다. 간호사가 적정인원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의사 못지 않게 과중한 노동을 하고 있다. 보호자 침상이 딸려 있는 한국 특유의 병실구조는 환자 간호를 가족이 맡아 하는 전통문화의 연장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간호사가 환자 간호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하게 배치되고 있기 때문에 생긴 편법적 현상일 뿐이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환자를 돌보아야 하니 간호는 기계적인 관리와 통제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윤지향적 구조에 기초한 의료체계

왜 이런 현상들이 생기는 것일까? 기본적 요인은 의료체계의 구성원리가 공공성보다는 영리의 실현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윤이 남는 부분은 더 많이 하게 되지만 이윤이 남지 않는 부분은 관심이 덜 가기 마련이다. 여기서 행위별 수가제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든 의료행위에 가격이 매겨져 있는데 때로는 그 가격이 실제 시장가격과 차이가 날 수 있다. 어떤 의료 행위의 난이도나 재료비가 의료수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의료 공급자가 느낄 경우 그 의료행위는 적게 하게 된다. 아니면 박리다매 방식으로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하여 보상을 얻으려 한다. 당연히 환자에 대한 세심한 관심, 충분한 설명이나 안전조치 따위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여기에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재료는 계속 시장에 나오고 있다. 새 것은 이전 것보다 효능이 좋을 수도 있고, 더 편리하거나 보기 좋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의료보험제도에서 정하고 있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가격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불일치는 공급자들이 지속적으로 수가에 불만을 제기하게 만든다.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중·상류층의 의료욕구는 점차 고급화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공급자들도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급의료를 구매할 수 있는 중·상류층은 소수이기 때문에 소수의 병원들만 이런 추세를 따라간다면 사회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원이 민간 병원인 상황에서 고급화, 상업화는 몇몇 병원에 한정되기 어렵다. 이것이 서구의 의료체계와 우리의 결정적 차이이다. 서구는 거의 대부분의 병원이 공공병원이거나 민간비영리병원이다. 10% 미만의 병원만이 고급화된 의료욕구를 감당하는 민간병원이다. 반면에 우리는 공공병원이 10% 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공공병원들도 지방공사 등의 형태로 수익성 창출을 강요받고 있다. 사실상 공공병원과 민간병원이 기능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실력 있는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실정으로 인해 환자들의 외면을 받는 것이 오늘날 공공병원의 현실이다.

의료 공급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과연 공급자들의 기대수준에 맞추어 의료수가를 인상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의료수가를 인상하면 ‘과소진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가 인상과 함께 ‘과잉진료’ 문제는 더 심각해 질 수도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충분한 설명이나 세심한 배려는 경제적 동기를 넘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의 의료에서는 의사가 주도하는 일방적 커뮤니케이션만 존재한다. 온라인 시대는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시대다. 환자가 궁금한 것을 자유롭게 물어볼 수 있으려면 의사들은 ‘듣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의료공급자들의 강한 권위주의적 성향을 고려할 때 이러한 것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 의사가 주도하는 의료에서 환자는 자기가 느끼는 것을 의사에게 충분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과 불신 및 불안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의료 재원의 확충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의료체계의 구성원리가 바뀌지 않으면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의료체계의 구성원리가 변화할 때 비로소 의료는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조병희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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