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0월 2009-10-01   1186

삶의 길목에서_한류와 혐한 사이



한류와 혐한 사이



고진하참여사회」 편집위원


이곳 필리핀에서도 한류 바람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슈퍼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흘러나온다.
두어 달 전부터 간간히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사방에서 틀어댄다. 발 빠른 사람들은 벌써 동영상을 보면서 춤까지 터득했다는 소문이다.
길을 가는 우리에게 순박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어설픈 억양으로 “안녕”하고
인사를 던지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익숙한 풍경이다.
예전에 내가 머물던 한국 어학원의 기숙사 식당에는 TV가 한 대 놓여있었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 몰이를 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필리핀의 공용어인 타갈로그어로 더빙되어 방송되었다.
기숙사의 도우미들은 식탁을 차려놓고 TV 앞에 코를 빠뜨리고 앉아 있곤 했다.
한국 드라마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필리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전에 주로 방송되었던 스페인이나 미국 드라마에 비해 한국 드라마는
덜 폭력적인데다가 탄탄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좋은 반응을 얻은 것 같다.
가요 쪽에선 박산다라, 2NE1, 빅뱅 등이 이곳 사람들에게 낯익은 한국 출신 가수들이다.
대중문화의 선전과 더불어 한국제 휴대전화나 컴퓨터, 가전제품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환호와 열광이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정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스튜디오를 얻어 살고 있다.
1층은 관리사무실과 카페 따위가 있고 2층부터 4층까지 층마다 10개가 넘는 방이 있다.
취사를 할 수 있지만 내부에 공간을 구획하는 칸막이가 없고
룸 서비스, 유료 세탁과 청소 서비스 등이 제공되는, 원룸과 호텔이 절충된 주거형태이다.
입주자 중에는 영어 공부를 하러 와 있는 한국 젊은이들이 있지만 현지인이 더 많다.
현지인들의 소득 수준에 비해 임대료가 비싼 편이어서 이곳에 사는 필리핀인들은 중산층 이상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식료품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오는데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른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여자들의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있어 보이는 필리핀 미시 아줌마와 똑 부러지게 생긴 한국 처녀가 문간에 서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듯 “당신 남편”까지 들먹거리면서
설전은 아슬아슬한 수위로 치닫고 있었다. 필리핀 관리직원들과
입주자들은 삼삼오오 싸움을 구경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결국 한국 여성의 입에서 “가난하고 멍청한” 이라는 공격이 튀어나오자 필리핀 여성은 지지 않고 “메스꺼운 한국인”이라고 반격했다.
“어쨌든, 한국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야.”
그 순간 필리핀 여성의 아들로 보이는 일여덟 살 먹은 사내아이가 이렇게 조용히 내뱉듯 말하는 것을 나와 우리 둘째 아이는 분명히 들었다.
아이가 그렇게 말 하는 순간 우연히 우리가 그 옆을 지나갔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보이는 하얀 피부의 한국 여자 아이 들으라고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 당신 옳지 않아.”
싸움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자, 모든 입주자들을 공평무사하게 대하고 입주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관리직원까지 개입하여 한국인 입주자를 비난했다.
본분과 동떨어진 그녀의 행동은 제나라 사람 역성드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직원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제딴엔 소신껏 시비를 가려보려는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였는지 모를 일이다.
기실 모든 한국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잘 산다는 이유로 은근히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이런 일부 빗나간 한국인들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이 서서히 실망과 냉소로 변해가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부정적으로 변한 감정은 이따금 공격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서양 식민주의를 오래 경험한 필리핀의 경우 총기 소지가 비교적 자유로워서 술자리의 사소한 다툼이 치명적인 싸움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필리핀 남성들이 자신들을 표적으로 삼아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기 때문에 술집에 갈 때는 현지인 친구들을 동반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국 남성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필리핀 취객들의 공격적 태도를 취중의 객기로만 돌리는 것은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지 않는가.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것인가.
친구를 처음 사귀기는 쉽지만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이어나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잣대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보려는 노력은 좋은 관계의 초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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