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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권리 찾기’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


이제훈 <한겨레> 통일외교팀장
사진 김영광 사진가

시인 김선우는 지난해 마지막 날 <한겨레>에 쓴 칼럼을 이렇게 시작했다.

“마음의 스승이 되는 스님이 몇 분 계신다. 그 중 한 분 얘기다. 내가 아직 이십대였던 어느 해, 산사에 찾아가 머물 때였는데 어디선가 포장이 몹시 꼼꼼하게 된 소포가 왔다. 가위를 찾아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할 때 스님이 말씀하셨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거다.’ 포장 끈의 매듭을 푸느라 한동안 끙끙거리며 나는 짜증이 났다. 가위로 자르면 편할 걸 별 것 다 나무라신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끙끙거리면서도 결국 매듭을 풀었다. 다 풀고 나자 스님 말씀, ‘잘라 버렸으면 쓰레기가 됐을텐데, 예쁜 끈이니 나중에 다시 써먹을 수 있겠지?’ 천진하게 웃으시더니 덧붙이셨다. ‘잘라내기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연처럼.’…”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 끈을 푸는 쪽인가, 아니면 끈을 자르는 쪽인가?


‘내 문제’거나 ‘내 가족의 문제’가 될 비정규직

1568. 2005년 7월5일 기륭전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한 뒤로 ‘사람다운 삶’과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 나선 나날들이다(2009년 10월21일 기준).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정권이 바뀌고, 회사의 소유주가 세 번 바뀌었고 많은 파견직, 비정규직이 기륭전자에 새로 채용됐다.

그러나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그들의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회사 쪽의 대규모 해고에 맞서 처음엔 조합원 200명으로 시작했으나 1568일이 지난 지금, 회사와 정부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고 함께 하고 있는 조합원은 32명. 그러니 지난 1568일 사이 168명이 떠난 셈이다.

이 길이 옳지 않아서도, 서로 간에 의견 대립과 분열이 있어서도 아니다. 억울하고 분통터지지만, 살아야 하기에, 가족과 자식들을 굶길 수는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어딘가에서 또다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늘 씩씩하고 사려가 깊던 권명희 조합원이 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니 남은 32명은 먼저 떠난 168명이 미안한 마음으로 위임해놓은 ‘사람다운 삶’과 ‘노동자의 권리’까지 찾아야 하는, ‘자존심’을 건 질긴 싸움의 길 위에 있는 셈이다.

그 사이 제 생계 챙기기도 버거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이 도왔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 말마따나 ‘슬픈 연대’다. 지난해엔 촛불시민들이 큰 힘이 되었고, 장기 단식 소식에 음식을 장만해온 이름 모를 시민, 조합원 아이들 공부를 돌봐주러 농성 컨테이너로 찾아오는 시민도 있다.
그러나 찾아와야 할 사람들은 4년이 넘도록 발길을 하지 않았다. 국가공무원 가운데 제 발로 이들을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다. 용역 깡패들과 함께 힘없는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곤 했던 경찰을 빼곤.

그러니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1568일에 걸친 권리 찾기 도정은 쓸쓸하다면 더없이 쓸쓸한 것일 수도, 뜨거웠다면 용광로보다도 더 뜨거운 것이었을 수 있다. 하여 이번엔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을 모시기로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미 한국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선 현재 (2009년 3월, 전체 임금노동자의 52.3%)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결국 ‘내 문제’인 셈이다. 지금은 ‘내 문제’가 아니더라도 미구에 ‘내 문제’가 되거나 ‘내 가족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남의 일이다’ 생각 말고, 스님의 말씀처럼 비정규직 문제라는 얽히고 얽힌 실타래를 끊어버리지 않고 한 올 한 올 풀어낼 지혜를 모아보자.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기륭전자 노동자들과 김소연 분회장의 지난 1568일 속으로 들어가보자.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전 기륭전자 건물 옆) 약 3평 남짓한 기륭전자 분회 컨테이너 농성장.

회사는 500만 원 벌금 내고 ‘죄값 다 치렀다’ 버텨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2005년 7월 31일 해고자 발생 때부터 해오던 아침 출근투쟁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10월 20일엔 ‘비정규, 쌍용, 용산에서의 국가권력하루도한 폭력과 용역폭력하루대한 3주체 공동투쟁’ 결의대회를 치렀다. 10월 20일은 지난해 용역깡패들이 경찰과 공조해 ‘기륭자본 규탄결의대회 및 문화제’를 폭력으로 진압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요즘은 이렇게 오래도록 싸워도 문제가 왜 해결되지 않나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2005년 8월 3일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회사는 벌금 500만 원 내고 끝이다. ‘죄값은 다 치렀다’는 것이다. 법이 파견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않으니 회사 쪽은 ‘법대로 하자’는 말만 되뇐다. 파견은 26개 업종에 한해서만 허용되는데, 실제론 업종 불문하고 대다수 기업에서 파견직 노동자를 쓴다. 파견 기간은 3개월만 하고, 한 차례에 한해 연장이 가능하다. 6개월은 합법적으로 파견직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같은 파견직 노동자인데도 6개월이 되기 전에 그만 나오게 했다가,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하는 ‘편법’을 쓰고 있다. 그래서 지난달에 새로운 투쟁방향을 밝혔다. 직접적으로는 우리 고용 문제를 원인 제공자인 기륭전자가 직접 책임지는 방식으로 풀도록 할 것이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 간접고용, 결국 파견제가 문제다. 앞으로 파견법 폐지를 요구하는 연대투쟁을 진행하려고 한다. 대정부 투쟁을 선포한 셈인데, 물론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0월 22일부터는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갈 것이다. 붙잡아가더라도 계속 할 것이다. 10월 20일 집회에서 정운찬 국무총리 면담을 공식 요청했는데, 면담을 거부하면 그에 대응해 싸우게 될 것이다.”

-요즘은 몇 명이나 함께 하고 있나

“애초 조합원 200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32명이 남아 있다. 32명 가운데 모든 걸 작파하고 전면적으로 투쟁에 결합하고 있는 사람은 8명이다. 일이 길어지며 그만 두신 분들이 많다. 다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우니까. 떠나신 분들은 대부분 파견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다른 곳에 취직해 일하신다. 떠나신 분들과 거리에서 만나면 인사도 하고 그런다.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다. 이를테면 어제까지 철야농성을 함께 했던 분이 오늘 아침에 아무 얘기 없이 안 나오시는 경우가 있었다. 미안하니까, 그런 거다. 나중에 만나면 그러신다. ‘미안하다. 꼭 잘 해결되면 좋겠다’고. 그렇게 한명씩 울면서 떠난다. 그분들 상처가 심하다. 이토록 오래 싸웠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김소연 분회장(오른쪽)과 조합원들은 컨테이너 농성장에서 회의나 일상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젠 해고당하지 않겠구나’ 하며 우셨는데…

-오래도록 싸워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노동조합을 만든 거다. 사실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쉬는 시간 10분동안 150명이, 뒤이어 다른 분들이 가입해 조합원이 200명이 됐다(당시 기륭전자 생산직 300여 명 가운데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을 더해 200명이 조합에 가입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조합에 가입하며 우시기도 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으니 이제는 해고 당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지난해 투쟁이다. 10명이 결의해 4월에 삭발을 하고 투쟁에 나섰는데, 싸움이 그렇게 커질 줄은 우리도 몰랐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지난해 싸움은 처절했고, 정치권을 비롯해 전사회적인 관심을 받았다. 16m 조명탑에서 고공농성, 구로역 35m 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비롯 급기야 모든 조합원들의 기륭전자 앞 무기한 단식농성, 지난해 6월 28일엔 1040명이 서울시청 앞에서 동조단식과 삼보일배 행진 투쟁을 벌이기도 해 언론과 사회의 관심이 쏠리자 민주노동당을 비롯 정치인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
 
문화예술제도 기억에 남는데, 평상시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다. 농성장 앞에서 난장도 벌어지고 공연도 이뤄지고, 조각도 세워지고, 그런 거 보며 조합원들이 새로운 걸 많이 경험했고, 많이 감동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지난해 단식은 외롭지 않았다. 평생 잊지 못할 투쟁의 과정이었다.”


노동부가 오히려 회사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화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있을텐데…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들은 용역들한테 거의 날마다 맞았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도 처벌받지 않고, 폭력에 저항하던 우리만 연행되고 구속됐다. 그런 게 화난다. 우리들이 용역깡패들과 경찰에 의해 끌려나올 때 구사대들은 뽕짝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환호성을 지르고 그랬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많은 조합원들이 그걸 보고 ‘이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기륭전자로 돌아가기 싫다’고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쉬운 대목은 노동부의 행태다. 우리는 처음에 불법파견 판정만 받으면 고용도 보장받고 일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노동부는 진성도급은 합법이라며 회사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며 사실상 회사 편을 들었다. 법원도 우리가 기륭전자를 상대로 낸 소송을 각하했다. 실제 고용주인 기륭전자가 아니라 파견업체인 휴먼닷컴을 상대로 소송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파견업체를 상대로 책임을 물으라니,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파견직으로 살아가라는 소리냐? 그런 과정을 거치며 법이 우리 편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장기 투쟁으로 돈을 벌지 못하니 생계를 해결하기가 어려울 거 같은데, 누가 도와주나

“처음엔 정말 어려웠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다. 한 달에 5천 원, 1만 원씩 꼬박꼬박 보내주시는 분들이 200여 명 정도 된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돈을 계좌로 넣어주시는 분들도 있다. 가끔 물건도 팔고 해서 투쟁기금을 벌충한다. 싸움이 오래되다보니 다들 가족관계나 친구관계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경조사 같은 거 전혀 못 챙긴다. 그래도 지난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올해는 아직 물건 팔러 다닐 일이 없었고, 아직도 도움이 된다.”


정글 같은 세상, 사람다운 삶은 지켜야

-투쟁이 목표로 하는 바가 있다면, 최소치와 최대치는?

“최대치야 당연히 직접고용 정규직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다. 최소치라면 어떤 형식으로든 기륭전자가 우리 고용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내놓은 최소한의 요구가 기륭전자의 자회사에서 우리 고용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 어려운 길을 계속 가는 이유는?

“요즘은 어딜 가도 파견직으로 취업하는 게 불가피하다. 고용불안이 심각하다. 현장에서 파견직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하루 10시간씩 비인간적 환경에서 일하며 버티자면 동료들끼리라도 의지해야 하는데, 동료들간 공동체가 없다. 회사의 정규직-비정규직 이간질로 자리를 지키려고 서로 경쟁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마음도 열지 않고, 어려움도 나누려하지 않는다. 시간과 돈이 없어 사람 노릇 하기도 어렵다. 경조사도 서로 챙기지 못한다.

조합원들끼리 ‘너무 많이 왔다, 돌아갈 수가 없다’는 얘기도 한다. 어쨌든 결론을 내야 하는데, 우리 잘못이 없으니 회사에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나. ‘마지막 남은 자존심 끝까지 지키고 싶다’, 그런 마음이다.

회사는 가능하면 돈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돈만으로 안 되는 게 있다. 지금껏 많은 분들이 연대해주셨는데, 그 분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게 조합원들의 마지막 마음이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게 전부는 아니지 않나.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싸울 것이다.”

김소연
1970년 서울에서 나서 지금껏 서울에서 살아왔다. 답십리와 상계동 등지에서 살았고, 구로공단에 취업한 뒤로는 공단지역에서 자취해왔다. 동대문 쪽의 정화여상을 나왔다. 고 2 때인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인 그해 11월 다니던 정화여상에서 전교생의 참여 아래 사학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당연히 그도 함께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여상에 왔는데, 수업도 부실하게 하고, 장학금도 떼어먹는 게 억울했다”고 한다.

1992년 구로공단의 노블전자에서 6개월을 일했다. 그러다 담장 바로 건너편 갑을전자에 정규직으로 취업해 8년을 다녔다. 갑을전자가 2000년에 파산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노동조합장이 그였다. 마지막 조합장으로서 노동자들의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받아내느라 1년 남짓 싸웠다. 갑을전자 파산 뒤처리가 끝나고 신문광고를 보고 휴먼닷컴을 통해 기륭전자에 파견노동자로 입사했다. 기륭전자에서 받은 월급은 갑을전자에서보다 훨씬 적었다. 기륭전자 입사 초기인 2002년엔 50만 원 조금 넘게 받았다. 2005년 해고되기 전에는 다 합쳐서 한 달에 64만1850원을 받았다.

결혼은 아직 하지 않았다.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냥 사는 게 바빴다”고 한다. 산과 강, 유적지로 여럿이 어울려 놀러 다니는 걸 참 좋아한단다. “갑을전자 다닐 땐 조합이 있어서 자주 놀러다녔는데, 기륭에선 (돈도 시간도 없어) 그게 안 되네요”라고 했다. 노동자라고 일만 하며 살 순 없고,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나누고 재밌게 살고 싶은데, 현실이 그걸 용인하지 않는단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예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닌 거 같고…. 올 6월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개막식에서 기륭문제를 제기하느라 제네바와 파리에 갈 일이 있었다. 거긴 사람들이 사는 게 한국과 참 다르더라. 거기선 정년 연장에 반대하는 투쟁도 있다고 하더라. ‘40년이나 일했는데 더 일하라고?’라며. 한국에선 정년 연장해달라고 싸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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