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1394

이슬람은 왜 반미인가?

이슬람은 왜 미국에 대해 반대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반미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듯, 중남미인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치듯, 팔레스타인인들이 미국과 미국의 정치인들, 그들의 정책을 혐오하듯, 무슬림들이 미국을 꺼리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어느 면에선 정당하다.

세계 초일류국가이자 초강대국인 미국의 역할과 영향은 막대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현실에서 지상의 그 어떤 나라, 어떤 민족도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2차 대전 직후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의 땅을 차지하고 자기 나라를 세우겠다고 했을 때 미국이 취한 태도를 돌이켜 보자. 그 때 미국은 국익우선주의에 입각해 날도둑과도 같은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다. 이런 미국에 대해 어떻게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와 부당한 힘에 눌려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은 물론,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형제 무슬림 국가들은 치를 떨었을 것이다. 아니 칼을 갈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슬람 국가들은 오랜 세월 인내와 항거를 계속해왔다.

또한 미국과 서구 문화가 주도하는 옥시덴탈리즘에 의해 이슬람 세계는 계속 편견의 그늘에 가려져있었다. 칼과 코란으로 대표되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집단, 일부다처제의 반문명적 풍속 등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퍼뜨린 이슬람에 대한 편견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며, 하루아침에 사라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따라서 서구의 것을 무차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 이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교육받았다. 결국 우리의 뇌리에 존재하는 이슬람 세계는 어쩐지 불길하고 사악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만난 무슬림들은 절대 호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에 대한 친절을 덕목으로 여기고 힘써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편견의 그늘에 가려진 이슬람문화

미국의 일방적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집권 탈레반의 탄생 배경에 바로 미국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미국의 책임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아프간 사람들이 모두 탈레반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테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테러의 원인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누가 떠맡긴 것도 아니고 자임한 세계경찰국가로서의 위상, 그 권위와 오만에 젖어 자신들이 빚었을 수도 있는 아픔과 비극을 모른 채 해서는 안 된다. 알고도 무시하면 안 된다.

반미시위가 한창인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바마드에 살고 있는 현지인 친구가 전한 소식에 따르면, 파키스탄인 대다수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도적 차원에서, 아니 좀더 정확히는 이슬람 형제애에 입각해 미국이 자신들의 형제를 공격하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한다.

이번에 파키스탄에서 촉발되고 점화된 반미시위가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지로 번져나가게 된 것은 미국의 이슬람에 대한 무지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즉 지나치게 자신들의 판단, 결정을 믿은 데 있다. 세상사에는 언제나 예상밖의 변수가 있는 법. 미국이 9?1 테러를 설마 했다가 당했듯, 요원의 불길처럼 거세게 번져나가는 반미시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미국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민중의 아픔이다. 죄 없는 민중이 떠맡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핍박과 고통이다. 세상살이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이 제일 크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서 어렵게 살아온 아프간인들이다. 미국이 탈레반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급기야 개전함으로써 파키스탄, 이란,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내몰려야 하는 피난민들의 절박한 아픔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공습과 구호물자 공수의 병행이라는 유치한 장난은 그만두어야 한다. 더 근본적인 사태수습이 필요하다.

영문도 모른 채 페샤와르로 몰려드는 사람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페샤와르의 트라이벌 에어리어(Tribal Area)에는 오래 전부터 아프간 난민촌이 형성되어 있다. 페샤와르 주민들의 상당수가 그러하듯 200여 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대부분 파탄족(푸쉬툰이라고도 불림)으로 무슬림이다. 아프가니스탄 내 힌두쿠시 산중에 사는, 흔히 카피르(Kafirs)라 불리는 소수종족들은 비무슬림이다. 파탄족이건 카피르건 모두 다 무척이나 소박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다. 그릇된 편견에 물들어 이들을 잔인한 종족으로 오해하던 사람들은 이들의 선한 웃음을 만나면 의외의 표정을 짓기 십상이다. 파탄족이 용감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영화 <람보 III>에 람보와 더불어 전통 민속경기인 부즈카시를 하는 사람들, 말을 타고 힌두쿠시 산자락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사람들이 파탄족 용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천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이다. 1997년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나는 가난한 삶 속에서도 빛나는 아이들의 선한 눈망울에 감동받았다.

사탕과 펜 따위의 선물을 받고는 집에 있는 난(naan 둥글넓적한 밀가루 빵)을 들고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여기 남자들, 예외 없이 수염을 기르고 개성적인 모자를 쓰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생존의 기로에 서있기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진 못해도 낯선이를 꺼리지 않았다. 부르카(burqa)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여인들은 매우 수줍어했다. 한낮의 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돌고, 습도가 80∼90%를 넘는 지역, 그런 곳에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장옷을 뒤집어쓰고 사는 여인들을 상상해 보라. 밖에서는 눈망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파탄족, 아니 아프간 난민들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빈 라덴이 누구며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들(?)의 지도자가 물란 오마르인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 미국이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전쟁의 와중에 폭격으로 집을 잃고, 다치고, 피붙이를 잃는 절망 속에서 페샤와르로 몰려들고 있다. 과연 정의의 신은 있는 것일까? 1997년 난민촌을 둘러보고 나서 그러했듯, 나는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전지전능한 알라는 어디 숨어 계시는가? 명백한 것은 아프간 주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주는 절망적 공포에 사로잡혀 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더 이상의 불행을 진정 바라지 않는다.

어느 면에선, 빈 라덴의 출현은 예고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이를 예측하고 예방하지 못했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미국의 책임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빈 라덴의 변신을 예상하지는 못했어도, 그를 길러내고, 그에게 원조를 한 것이 다름 아닌 미국이라는 것을. 황금의 삼각지대를 지배한 마약왕 쿤사, 캄보디아 무력쿠데타의 주인공 훈센을 창조하거나 후원한 것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미국이 좀더 현명했더라면, 1960년대 미국 사회의 거센 흐름인 흑인해방운동에 말콤 엑스 같은 과격주의자가 있듯, 로마에 항거하던 유대인 중에 가롯 유다 같은 파티산(partisan 빨치산)들이 있었듯, 반미노선의 이슬람세력 중에도 과격한 부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국은 알았어야 했고, 그에 적절히 대처했어야 했다.

이제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복수가 아니다. 힘 있는 미국에게 요구되는 것은 참다운 자비요, 인류애다. 파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약속한 경제원조 따위가 아니다. ‘무한 정의’ 운운하며 우방들을 협박하는 깡패짓이 아니다.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아픔을 승화시키는 인내와 용서다. ‘눈에는 눈’ 식의 보복의 악순환, 강자의 우월주의가 절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탄식이 떠오르는 것은 왜인가? 그는 자서전격인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는 구원될 수 없다. 그러나 인류는 구원되어야 한다. 내가 인류의 구원을 바라므로.”

연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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