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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11월
  • 2000.11.01
  • 885
얼마 전 제주도에서 남북 군사회담이 열렸다. 국제법상 ‘전쟁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중지상태’를 뜻하는 정전(停戰)체제 아래서 교전당사자 간, 그것도 양측 군대 대표 간의 회담은 실로 우리로 하여금 만감이 교차하게 했다. 이 회담에 임하면서 우리 당국자들은 다른 것 못지않게 의전에 관련해서도 상당히 고심한 것 같다. 보도에 의하면, 북측 군사대표단을 맞을 때 우리측은 ‘거수경례’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숙고를 거듭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인민군을 향한 거수경례는 불가하고 대신 ‘정중한 악수’로 맞이하기로 하였단다. 군인이 거수경례를 하지 않고 악수로 인사를 나눈다? 그 어정쩡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란 안 보고도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거수경례’는 군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법이다. 군복을 착용한 군인이 모자를 벗어 인사하거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군인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거수경례가 ‘충성’의 예(禮)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인민군에겐 할 수 없다? 아뿔싸! 그렇다면 북측의 군인은 왜 제주공항에 내리면서 우리측 대표단에 냅다 ‘경례’를 붙였을까. 설마 인민군 장교가 우리측 장교들을 향해 충성을 표하기나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분별력이 없어 저지른 실수였을까? 극진한 환대에 순간적으로 감동해서였을까? 그래서 실수를 저지른 그 인민군 장교, 돌아가서 숙청당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같은 상상들은 사실 그 동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발상들이 우리를 얼마나 졸렬하고 유치하게 만들고 마는지 우리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얼떨결’에 한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해프닝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단지 군인으로서 마땅한 예를 표한 것이었을 뿐이라면, 정말 단지 그뿐이라면, ‘거수경례’하나를 놓고 그토록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우리가 얼마나 볼품 없어지고 머쓱해질 것인지 생각만 해도 서글퍼진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남북관계는 정확하게 이 지점에 놓여 있다. 어디 거수경례뿐이겠는가. 인사는 어디까지나 그저 인사일 뿐인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걸 놓고 충성의 표시이니, 철없는 돌출행동이니, 실수니, 심지어는 “정신자세가 틀려먹었다”고까지 온갖 해석학적인 상상력을 다 펼치는 것이야말로 정말 ‘오버’하는 것이다. “아, 그 북한군인 씩씩하게 인사 한번 잘 하네” 하며 넘기는 넉넉함이 우리에겐 없다. 아니 용납되지 않는다.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이긴 하지만, 만일 우리측 군사회담 대표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북측 장교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였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우리 언론들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주적개념이 혼란스러워진다”, “우리 군의 안보태세가 우려된다”라고까지 외치면서 최근 남북관계의 변화를 마뜩찮아하고 있는 어떤 수구신문은 보나마나 온갖 독설을 다 동원하여 “정신나간 대북정책”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포용정책이니, 광폭정치니 하는 거창한 용어를 들먹일 것도 없이 아주 소박한 상식만이라도 제대로 통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탱크로 주석궁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사람에게,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제는 냉전적인 사고를 버리고 화해와 협력의 광장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한낱 부질없고 허망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화해와 협력의 첫걸음이라는 건 상식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건강한 사회는 기실 상식이 준용되는 사회를 일컫는다. 화해와 협력, 통일이 뭐 별것이겠는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군대의 정복을 한 북한의 고위장성이 태극기 앞에 경례를 올려붙이고, 대한민국의 고위급 장성이 인공기 앞에서 역시 예를 다하는 것. 그런 ‘사건’들이 단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으로, 나아가 멋진 모습으로 비춰지는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화해와 협력, 통일의 시대가 아니겠는가. keenae@ hanmail.net
김형완 참여연대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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