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1-01   1012

청진기를 든 시민운동가가 일구는 생명공동체

성동주민의원 윤여원 원장

‘환자 권리선언’

최근 의사파업으로 문을 걸어잠갔던 병원 앞에 나붙었음직한 글귀다. 환자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아던 이익집단의 철옹성 앞에, 초라한 행색으로 말이다. 2호선 전철을 타고 건대입구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빠져나오면 바로 보이는 성동주민의원. 이곳을 찾은 날은 바로 3차 의사파업이 한창이던 지난 10일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진료를 하고 있는 이곳에선 아주 색다른 광경이 목격됐다.

환자 대신 ‘환자권리선언’ 한 병원

“환자는 인간으로서 관심과 존경을 받고 성실한 의료서비스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자신의 건강과 관련한 사항을 상세하게 알 권리가 있다.” 이른바 환자권리선언. 성동주민의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같은 내용의 현수막 문구다. 환자를 대신해 병원측이 환자권리선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땅에 떨어졌다는 이 시대에 한 동네의 조그만 병원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우선 자초지종을 이해하려면 15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난 86년 당시 공장 밀집지역인 이곳 성수동엔 4개의 무료진료소가 있었다. 고대, 서울대, 연대, 한양대 등 4개 대학 의대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꾸려나가던 공간이었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현장에 무작위로 노출돼 있으면서도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진료하고 산재문제를 처리했다. 또 이들은 노동 야학도 했다. 암울했던 노동의 현장에서 ‘한국판 슈바이처’가 되고자 했던 이들이다.

이로부터 3년 뒤인 89년. 이들은 ‘동부지역 보건의료인회’를 구성했고, 부설기관으로 성동주민의원을 세웠다. 소위 지역운동의 전초기지. 주민들과의 자연스런 만남 속에 지역공동체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곳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들이 주축이 돼 적게는 50만 원에서부터 1,000만 원에 이르기까지 20여 명이 출자해 40여 평 남짓의 병원 공간도 확보했다. 이 때 총대를 멘 사람은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병원장을 하고 있는 윤여운 씨(40세).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였던 그는 1주일에 4∼5 차례씩 무료진료활동과 야학 교사로 활동해왔다.

“당시 집에 들어가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병원에서 기본 업무를 끝내고 저녁 8시에 이곳에 와서 2시간 동안 야학을 하고, 또다시 병원에 들어가 남은 일을 마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병원이 생기고 누가 그걸 책임져야 했는데 저 역시도 나서길 꺼렸습니다. 의사보다는 지역운동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도 (원장을) 하라고 해서 딱 1년만 하고 지역운동을 벌인다는 조건으로 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됩니까. 보시다시피 1년이 아니라 10년 넘게 원장으로 있습니다.” 윤 원장의 당시 회고다.

현재 병원 벽에 걸려 있는 환자권리선언은 이같은 ‘역사’의 산물이다. 3개월에 걸쳐 병원 운영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올해 초 완성해 환자들에게 선보인 작품이다. 병원의 진정한 주인은 환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판 슈바이처’들이 꿈꾸는 목표였던 셈이다.

무료진료소가 명실상부한 지역 대표적 병원으로

다시 병원설립 초창기로 되돌아가보자. 1차 의료기관의 모범적 모델을 창출하려는 당초 계획은 환자 수가 폭주하면서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환자 수 200여 명. 한 명의 의사가 진료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또 공간도 비좁았다. 따라서 90여 평의 현재 공간으로 병원을 옮겼고, 의사 한 명을 더 배치했다. 그럼에도 주민들과의 대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우리 실험은 환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물리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또 가정방문을 통해 교육자료를 배포하기도 하고, 질병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건전지 수집 등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그들은 성실 진료만을 원했습니다. 전인적인 접근을 위해 환자들이 오면 직업이 뭔지, 가정 생활은 어떤지 등을 물어보고 대화를 했지만 다소 퉁명스럽게 반응하더라고요.”

윤 원장은 따라서 당초 병원을 통한 지역운동의 실험은 일단 접기로 했다. 성실진료를 원하는 주민들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병원과 차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강관리센터를 만들어 만성질환, 고혈압, 당뇨 등에 대한 특별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을 1달에 1차례씩 방문해 체크하고, 당뇨교실 등 소모임도 꾸려나가고 있다.

10년 넘게 성동주민의원 원장으로 환자 진료에 전념했던 윤 원장. 그는 주민들의 환부만을 고치는 의사는 아니다. 오히려 지역사회의 환부를 치료하는 ‘운동가’로 불리는 게 제격인 듯싶다. 지난 8월부터 오후 3시까지 진료를 마치고, 달려가는 곳은 병원 뒷건물에 위치한 광진복지센터. 그는 이곳 센터의 대표이기도 하다.

광진복지센터가 하는 일은 우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진료비 감면 혜택. 65세 이상 노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진료비를 감면해주고, 장애인·고아가 수용된 관내 복지시설 2곳의 진료비는 전액 무료다. 또 1주일에 한 차례씩 ‘길거리 복원 활동’을 통해 현장에서 당뇨, 혈압 등을 체크하는 등 주민들의 건강교육에 나서고 있다.

광진복지센터의 가장 활발한 사업은 환경운동. 환경과 건강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인식에서이다. 게다가 사무국장인 민동세 씨(32세)는 ‘환경운동 전공’으로 오랫동안 환경운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 복지센터는 아차산 기슭에 고급 빌라가 들어서는 것을 저지했으며, 현재는 아차산 입구 만남의 광장 확장 반대와 워커힐 증축 저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6월에 개통한 인터넷 사이트인 광진닷컴(www.gwangjin.com)도 지역의 환부를 치유하기 위해 윤 원장이 운영하는 공동체적 공간. 현재까지는 구정 감시와 주민 생활 뉴스를 주로 다루는 지역 인터넷신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주민들 간 커뮤니티를 형성해 지역 사이버 시민운동의 메카로 키운다는 게 윤 원장의 포부다. 최근 언론에 떠들썩했던 성수여중 폭력사태도 광진닷컴이 제일 먼저 보도해 이슈화한 작품이다.

시민운동가가 직업인 의사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 지역 민주단체협의회 출범 당시 4년여 동안 의장직을 맡았고, 지금은 15개 단체들로 구성된 성동광진지역운동연대 기획단장을 맡고 있다. 이쯤되면 직업이 의사라기보다 시민운동가에 가까운 셈이다.

“지역운동의 목표는 지역권력의 획득입니다. 정치진출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역주민의 의사에 따라 중요 정책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죠. 사회가 바로 서려면 정책의 골간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건 중앙의 큰 단체들이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회가 전체적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일상적으로 지역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거죠. 결국 제도와 사람 사는 방식이 접목돼야 하는 겁니다. 지역운동이 상대적으로 중앙운동에 비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지만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얻는 잔재미는 많죠.”

그는 이렇게 잔재미에 취해 7∼8년간 지역운동을 하다가 시골에 가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단다. 그 때를 대비해 성동주민의원을 주인 없는 병원으로 만들었다. 초기 출자금을 다 돌려준 것이다. 운영위원회는 운영권만 가지고 있다. 지분을 주장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생활협동조합 형태로 주민들에게 병원을 돌려주기 위한 사전조치다. 불행히도 최근 병원 건물이 경매에 들어가 낙찰되는 바람에 2억6,000만 원의 전세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 실질적인 ‘주민병원’의 탄생이 좀 늦춰지게 된 것이다.

“의사란 직업이 매력적인 것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룬다는 거죠. 지역운동을 하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의사란 직업은 일단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의사 따로 지역운동가 따로 생각했는데 이젠 왜 내가 의사직을 뛰쳐나가려고 했는지….”

지역운동에 뜻을 품고 성수동에 정착한 지 15년 남짓. 이제 그는 지역사회를 한 공동체로 묶기 전에 스스로를 하나로 엮는 방법을 터득한 듯싶다. 지역공동체를 넘어 ‘생명공동체’를 위한 그의 꿈은 이제 막 영글어가는 중이다.

김병기(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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