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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07월
  • 2020.07.01
  • 651

모든 것을
바꾸려면

 

메릴 스트립, 나탈리 포트만, 케이트 블란쳇,

제시카 차스테인, 산드라 오가 한 영화에 나온다고?

 

그 어려운 걸 <우먼 인 할리우드>가 해냈다. 그 때문인지 상영될 때마다 화제를 모았다. 나는 작년에 연출작 <망치>로 DMZ 국제다큐영화제에 초청받았고, 그곳에서 <우먼 인 할리우드>가 손꼽히는 인기작임을 목격했다. 영화는 여성인권영화제에도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 기세로 개봉하여 한국에서 1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다양성 영화 기준 흥행에 도달한 것이다.

 

나도 이 화제의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상영 시간에 일정을 맞추기 어려웠다. OTTOver The Top 서비스를 기다렸지만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네이버에서 다운로드 가격이 대폭 하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20년 6월 기준으로 단돈 2,500원. 오랫동안 관심 가졌던 영화를 드디어 보게 됐다.

 

보고 나니, 약간 제목과 포스터에 낚였다는 기분이다. 포스터에 등장한 이들은 하나같이 유명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이다. 하지만 중반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여성들의 분투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즉 포스터에 등장한 인물보다 중요하게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이 많다는 뜻이다(흥행에 유리한 전략을 세워야 했을 배급사·홍보사의 입장을 헤아려본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7-8월 합본호 (통권 277호)

우먼 인 할리우드 This Changes Everything 

다큐멘터리 | 96분 | 2018 | 미국 | 전체관람가

감독 톰 도나휴

출연 지나 데이비스, 메릴 스트립, 나탈리 포트만 등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

영화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어렸을 때 반복해서 접하는 이미지가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 들려온다. 이 때문에 성별에 따른 제한 없이 장래를 희망하던 아이들이 6세 이후로 달라진다고 영화는 말한다. 여아들의 취향과 직업에 대한 상상력이 좁은 영역에 가둬지는 것이다. 콘텐츠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캐릭터의 대부분이 남성이기 때문이다(<니모를 찾아서1>에 나오는 모든 물고기가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90년에서 2005년까지, 미국의 전체 관람가 흥행작 상위 101편 중에 대사가 있는 역할 72%는 남성이다. 

 

게다가 전체관람가 영화 속 여성의 의상은 남성보다 노출이 세 배 더 심하다. 이는 성인 남성의 시각에 맞춰 스스로를 단장하는(즉 섹스어필하는) 소녀들을 양산했다.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 드물고, 등장하더라도 뚜렷한 직업 없이 오직 ‘눈요깃거리’로만 소비되는 미디어에 대한 문제의식은 벡델 테스트를 탄생시켰다.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만든 세 가지 기준이다. 이름 붙여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남자와 관련되지 않은 대화일 것. 무척 관대해 보이는 기준이다. 그러나 테스트가 고안된 지 30여 년 지난 2013년에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는 과반수를 차지했다(물론 통과된 것 중에도 썩 흡족하지 않은 작품이 있다. <아메리칸 허슬>이 테스트를 통과한 이유는 여성 캐릭터들이 ‘꾸밈’에 대해 이야기 나눈 씬 덕분이다. 이 얼마나 관대한 기준인가!). 

 

1991년 <델마와 루이스>가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바뀔 것(This Changes Everything,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을 기대했다.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도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많은 관객들은 해방감을 느꼈다. 델마 역을 맡은 지나 데이비스가 다음에 출연한 <그들만의 리그> 역시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줬다. 영화 때문에 스포츠를 시작했다는 소녀들이 늘어난 것이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과 <헝거게임>이 개봉한 뒤에는 양궁 수업을 듣는 여자 아이들의 숫자가 105% 급증했다. 이런 작품이 나올 때마다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낙관론도 매번 성급히 등장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영화계 내 차별이다. 할리우드 제작 환경은 “백 개의 쿠키 중 99개 반은 남성들이 먹고 나머지 반 개를 두고 여자 감독들이 경쟁”하는 것과 다름없다. 미국에서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여성 감독에게 배정된 일감은 전체의 0.5%뿐. 심지어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타거나 장편영화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이미 능력이 입증된 여성들도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1964년 제정된 연방 민권법 제 7장은 고용기관이 고용에 성 차별을 두는 것을 금지하지만, 할리우드의 뿌리 깊은 차별 관행은 ‘자발적 준수’만으로는 개선되지 않았다. 조직된 힘으로 맞서 싸워야만 했다. 영화는 이를 위해 나선 미디어 업계의 여성들에 주목한다. 1983년 차별 관행에 대해 최초로 법적 대응을 한 6인의 여성 감독,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찾아가 움직이게 한 마리아 가이스, 인종·성별에 따른 고용 현실을 방송국별 차트로 만들어 FX의 균형 고용을 이끈 모린 라이스 등이다. 

 

싸움에서 통계는 강력한 무기였다. 통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지나 데이비스는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하고, 변화를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어릴 적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망친다”고 말하는 미디어의 영향 아래 자랐기에 “뭔지 모르지만 페미니스트는 절대 안 되고 싶었죠. 세상을 망친다니까”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과거로 가서 10대의 나에게 얘기할 수 있다면, 사실 네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은?

특정 성별, 인종, 계급이 콘텐츠 생산을 독점하면 콘텐츠의 관점과 내용은 제한된다. 다양한 창작자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면, 우리는 더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은 어떠할까. 영화진흥위원회 내 한국영화 성평등 소위원회가 2009~2018년 개봉 영화 1,433편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 감독 비율은 9.7%였다. 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비율은 2.5%로 더욱 낮아진다. 2019년 <벌새>, <메기>, <우리집> 등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들이 많은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먼 인 할리우드>가 보여주듯, 공적 개입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개별적·일시적 현상으로 끝날 수 있다. 관객의 몫도 있다. 영화를 선택할 때 제작진의 성비 균형 여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This Changes Everything>가 역설하듯, 변화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가 행동하고 감시함으로써 가능하기에. 

 


글. 최서윤 작가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데 휴간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최근 활동은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한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창작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종종 칼럼이나 리뷰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이 있습니다.

 

>>[목차] 참여사회 2020년 7-8월호 (통권 2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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