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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07월
  • 2020.07.01
  • 1242

'화려한 지옥'에
흑인이 필요했던 이유

 

지난 페미니즘 리부트 혹은 대중화 시기를 거치며 여성들은 “모든 삶이 중요하다All lives matter” 식의 위선을 고발했다. 민족과 국가, 국민과 시민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고, 여성들은 이를 깁고, 때우고, 메울 때만 등장한다. 그렇기에 소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그 자체로 격동기의 역사를 증빙한다. 1945년 해방의 순간에도 그랬다. 지금처럼 여성들이 광장에 밀물처럼 등장했고, 우후죽순 여성 단체들이 생겼다. 그리고 몇 년 뒤 1950년, 세계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 2020년, 초국적 지평에서 바이러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해방 후 여성서사에 등장한 ‘흑인’의 의미

불안전한 일상을 견디며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 당연했던 합의와 추진하던 협력이 무력화되기도 한다. 지금 떠오르는 순간은 재작년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들을 여성의 안전을 이유로 막아선 때이다. 지금의 BLMBlack Lives matter 운동, 즉 “흑인들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주장에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도 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무차별적 전형화로서 무슬림 남성이 자국 여성을 해할 수 있다는 포비아와는 다르겠지만, 여기엔 ‘약탈자 흑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작동한다. 

 

관련해서 떠오르는 것은 해방 후 1947~1948년 <부인신보>에 연재된 김말봉의 소설 「화려한 지옥」이다. 소설 속에서 기생 ‘오채옥’과 여대생 ‘백송희’는 ‘황영빈’과의 관계로 매독에 걸리는데, 이에 대항하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에 흑인의 형상이 개입한다. “숯과 같이 검”고 “먹물처럼 검은 얼굴”을 가진, “눈은 불쑥 나오고 코구멍은 벌릉하게 뚫어진 괴물 같은 흑인”이 채옥을 납치하는 장면이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민족의 보건을 주창할 때, 여성의 고난을 더하기 위해 흑인의 형상이 별다른 인과 없이 악의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다. 

 

최근 여성서사를 찾는 흐름에서 거의 호명되지 않았지만, 작가 김말봉은 일제강점기 저명한 대중 작가였다. 해방 이후에는 폐업공창구제연맹 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소설 「화려한 지옥」은 그가 여성작가이자 활동가로서 처음 내놓는 작품으로, 당대 공창제公娼制 폐지 운동의 성과로 인신매매금지령에 이어 공창폐지령이 통과되는 과정과 의의를 담고 있다. 송희는 황영빈에게 총을 쏜 후, 기생 출신 어머니에게 채옥을 부탁하며 감옥에서 눈을 감는다. 채옥은 송희 어머니의 전 재산 기부로 마련된 희망원에서 갱생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런데 당대의 여성운동과 여성 간 연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 기획된 여성서사에 꼭 흑인이 필요했을까? 

 

미군정기 미군의 일원으로 들어오기도 했을 흑인들은 그와 상관없는 “야만인”으로 말해진다. 이 흑인의 무자비한 얼굴은 민족에 대한 위협, 즉 여성의 성적 침탈로 받아들여진다. 해방자로서 미국을 향해서는 말할 수 없는, 즉 이 문명의 반면을 지적하는 역할을 이 범죄자 흑인의 형상이 대신하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거부를 문화적 인종주의라고 한다면, 흑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이다. 그러나 남녀를 나누고 그에 따른 자질을 위계적으로 배치하는 성차별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 역시 근대적 이분법에 따라 피부색을 흑백으로 나눠서 억압적으로 통치한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7-8월 합본호 (통권 277호)

소설가 김말봉1901~1961 ©한국내셔널트러스트

 

“I can’t breathe”에 공명하는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

여성의 ‘화려한 지옥’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흑인을 재현했듯, 이 두 카테고리는 곧잘 엮이는 동시에 엉키기도 한다. 한국전쟁 직후 혼혈인이 증가했지만, 순혈주의 한국 사회에서 그들은 거의 드러나지 못했다. 종종 이 ‘비극’의 원인으로 부도덕한 ‘양공주’, 혹은 전후 무질서한 여성들이라는 손가락질만이 더해졌다. 이러한 착시는 지금의 BLM 운동을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폭동으로만 보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질서정연한 촛불시위와는 다르다는 이러한 선긋기는 입맛에 맞는 장면만 보도하는 매체들 때문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폭력에 초점을 둘수록 시위는 흑인 남성의 얼굴로만 감각된다는 점이다. 이때 흑인 여성들뿐 아니라 이 운동에 동참하는 다른 문화를 가진 여러 인종은 언급되지 않는다. 거기에 1992년 LA한인타운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소환해 흑인에 대항하는 동양인으로 ‘루프 코리안Roof Korean을 기억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총을 든 가부장’이 아닌 한국인은 잘 초점화되지 않는다. 경찰에 의해 목 졸려 죽임당한 이의 마지막 말, “숨을 쉴 수가 없어요I can’t breathe”는 성차별과 편파적 공권력을 문제 삼았던 “나도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라는 애도와 연결될 수 있다.

 

몇 년 전 ‘메르스’ 정국에서 태동한 호전적 여성들은 누가 진정한 여성인지 심문해왔다. 그리고 코로나 국면에서는 어떤 이들과의 연대를 전략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여성가족 정책만이 아니라 여성혐오를 포함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듯, 다문화 정책만이 아니라 인종주의 비판 역시도 필요하다. 전쟁을 포함한 여러 재난이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는 않지만, 더욱 강력해지는 바이러스들은 공통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두려움을 무릅쓰고 강한 제지에도 불구, 한발 다가가 권력이라는 야만을 영상으로 증거한 10대 흑인여성의 용기를 기억할 때이다.


❶  1946년 좌우익여성단체 14개가 합동으로 조직한 여성단체. 1916년 일제가 강제도입한 공창제의 폐지운동을 전개했다 

❷  1992년 LA 폭동 당시, 가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간 한인타운 교민들을 일컫는다 


글. 류진희 원광대 HK+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연구교수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했다. 탈/식민 서사, 장르, 매체를 횡단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관심 있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소녀들』,『그런 남자는 없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을 같이 썼다. 

 

>>[목차] 참여사회 2020년 7-8월호 (통권 2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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