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7월 2004-07-01   873

“사회운동 하시는 분들, 먼저 행복해지세요”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지리산을 찾는다. 지리멸렬해지는 일상 속에서 다시금 소생할 수 있게 하는 기운을 지리산이 품고 있는 것일까? 지리산은 벌써 녹음이 한창이었다. 지난 6월 10일 지리산생명문화교육원에서 만난 한생명공동체의 이향천 운영위원장은 지리산에 퍽이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찾는 모든 이들에게 활력의 젖줄이 되는 지리산처럼, 마주 앉은 누구에게나 삶의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스스로도 지리산을 닮고 싶다고 했다.》

생명 살리려 귀농

이향천 위원장은 ‘한국경제와 조선후기화폐유통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딴 경제학자다. 그런 그가 농부로, 생명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데는 한 권의 책이 나침반 역할을 했다. 그에게 “자연계의 생명원리는 경쟁이 아닌 공생이요, 상생이고 협력”이라고 말하는 책의 메시지는 충격이었다. 지금의 삶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선택해준 길을 따라가고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을 때, 그가 내린 결론은 귀농이었다.

“고향이 익산인데요. 고향집 농사를 돕다보니 농사짓는 게 익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 잡으려고 전공도 경제학과를 선택했었죠. 그러다가 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였어요. 당시 쌀시장 개방문제가 핫이슈였는데, 경제학을 공부하다보니까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때 읽은 책이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쓴 『생명의 농업』이란 책이에요. 노자의 무위철학을 기본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인위적인 것은 배제하고 자연에 맡기는 농법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는데, 읽다보니 이게 해답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세상일이 다 그런데 귀농이란 것도 관심을 갖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잖아요. 준비도 많이 필요할 테고요.

“한 5년 준비했죠. 농업문제를 고민하다보니까 환경, 생태, 공동체 이런 것들과 자연히 연결되더군요. 관련 TV 프로그램을 모두 녹화해서 보고 자료와 책도 수집하고 환경농업, 자연농업에 관한 교육도 받으면서 혼자서 많이 공부했어요. 농사를 시작한 건 98년도였어요. 장수에 땅을 좀 얻었는데, 장수는 전북에서 가장 오지지만 생태적으로 가장 덜 파괴된 곳이었거든요. 장수에서 공동체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군수를 만나 얘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생태, 생명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척박했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귀농자들을 위한 현장실습장으로 실상사 장기 귀농학교를 만드는 과정에서 교감 역할을 권유받아 실상사로 오게 됐어요. 그때부터 한생명공동체 설립에도 관여하게 됐고요.”

한생명공동체, 좀 낯선데요. 공동체 소개 좀 해주시지요.

“저희는 21세기의 대안문명을 생태문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생명은 생태문명의 핵심인 생명운동을 널리 전파하고자 지난 2001년 8월 창립했고요. 귀농전문학교에서 생명운동을 실천할 인력을 양성하고, 그분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지역공동체 운동도 하고 있는데, 지역주민들과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를 회복시켜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한마디로 인드라망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공동체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생명이 지역공동체라면, 공동체에 걸맞는 지역 일상사업이 있을 거 같은데요.

“지역주민들과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어요. 초기에는 주민들의 동의를 못 받았지요.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정부가 쌀 수매를 안 하겠다고 하니까 농민들도 친환경농업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하려니까 불안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8헥타 정도만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고 있어요. ‘실상사작은학교’라고 중학교 과정의 아이들 교육기관도 4년째 운영하고 하고 있는데, 정작 이 지역 분들은 대안교육에 대해 잘 모르세요. 또 비인가 학교다 보니까 좀 불안해하는 것도 같고요. 그래서 대안학교 말고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요. 의료.복지 부분도 시도하고 있는데요. 어쨌든 농촌에서 제일 열악한 분야니까요.

고민고민하다가 자연의학.대체의학 강좌도 열고, 돈 적게 들면서 손쉽게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자연의학을 보급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농촌에는 허리, 어깨 아픈 사람이 많아요.

마침 귀농 학생 중에서 이 부분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리치료실을 만들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농업은 뿌리, 생명은 순환

직접 농사를 짓고 계시지요?

“벼농사 2천 3백 평하고 밭농사 한 3천 평 정도 해요.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는 거에요.”

‘할 거 없으면 농사나 짓지’ 라는 말을 참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귀농이나 할까’라고 말하는 건 사회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선생님에게 귀농, 농촌에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귀농은 단순히 농촌에 들어가서 농사짓는 게 아닙니다. 삶의 전환이죠. 몸만 농촌으로 옮겨가는 게 아니고 가치관, 철학이 모두 바뀌어서 그게 삶으로 나타나는 게 귀농이에요. 도시의 습(習)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또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보면 귀농은 조화로움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직물을 짤 때 씨줄 날줄 잘 엮여야 되는 것처럼 각자의 생각을 서로 맞췄을 때에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농촌에 삶을 내리고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겁게 하며 조화롭게 더불어 사는 것, 그게 귀농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게도 희망이 생기네요. 저 같은 사람도 농촌에서 쓰임새가 있다는 말씀처럼 들려서요. 선생님은 농촌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 왜 우리가 농촌과 농촌의 가치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시는지요?

“농업은 뿌리에요. 농촌이 무너져 버리면 도시도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도시는 도시대로 살면 되고 농촌은 농촌대로 살면 된다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둘은 절대 별개가 될 수 없어요.

농촌이 무너지니까 도시로 몰려가는 거고, 그러다 보니까 실업, 공해 등 온갖 도시 문제들이 발생하는 거잖아요. 도시와 농촌이 서로 오고 가는 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한 쪽으로만 몰리니까 순환은 고사하고 죽어나가기만 하는 거죠.”

《생명은 순환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순환이 끊긴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고 그 병증은 매우 절망적인 상태다, 생태문명의 핵심인 농촌의 가치를 복구하지 않으면 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그에게 농촌을 되살리는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좀더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고 싶었다.》

지금 쌀협상을 두고 논란이 많은데요. 농민단체는 관세화유예를 주장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관세화냐 관세유예화라는 단순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모두들 농촌도 살리고 국가도 함께 살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관세화유예 입장을 끝까지 고수할 수는 없다고 봐요. 언젠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하는 지금 상황에선 농민들이 관세화 유예를 주장할 수밖에 없지요. 문제는 관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그 폐해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농촌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이느냐입니다. 단순히 소득을 높여주는 게 아니라, 농촌에 사는 것 자체에 만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쇠고기 수입 개방 때도 더는 한우 못 키운다고 했지만, 오히려 한우가 경쟁력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잖아요. 일본은 관세화를 받아들이면서,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는 유기농업으로 전환했어요. 수출도 더 늘어났어요. 저는 우리도 충분한 가능하고 봅니다.”

결국 질 좋은 먹거리 생산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인데요. 최근의 웰빙 바람에서도 먹거리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건강한 먹거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해 줬다는 점도 있지만, 서민의 입장에서는 웰빙 바람에 편승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우리 먹을거리, 유기농산물을 선택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데요.

“유기농산물들이 보편화되면 그런 문제는 해소되리라 봅니다. 유기농 먹거리가 아직 비싼 건 사실이지만 이건 적게 먹고도 충분한 영양 흡수가 가능해요. 고기를 줄이고 채식위주로 식단을 바꾸면 상당부분 실현 가능합니다. 유기농가에 충분한 보상만 이루어지면 소비자들이 싼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국민 모두가 농업이 중요하고 정책적으로 농민을 보조해야 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유기농산물이 비쌀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국가적 유기농업 모델의 성공적인 케이스인 쿠바를 보면 실현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조직논리가 아닌 생명논리로 운동해야

《그는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둬야 할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생명’이라고 했다. 그가 참여연대에 주문한 것 또한 생명을 만드는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저는 무엇보다 참여연대가 조직 논리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직논리라는 틀에 매여 버리면 창의성이나 자율성은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조직이라는 것도 살아 있는 생명인데, 틀 속에 갇혀 있으면 경직되어 버리죠. 귀농하신 분들 중에서도 예전에 사회운동 하시던 분들이 많은데, 많이 경직돼 있는 걸 보게 되요. 한 가지 바람이 더 있는데, 일 그 자체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시민운동가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행복하다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활동가들부터 생명으로 가득 차야 생명이 살아나는 사회도 만들 수 있잖아요.”

생명은 그 자체로 유연하다고 그는 말했다. 유연한 삶, 유연한 운동, 그 유연함으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운동, 그의 운동과 참여연대의 운동, 내가 하고 있는 운동과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운동…. 살림의 기운을 품은 산, 지리산 자락에서 숙제 하나를 받은 기분이었다.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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