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7월 2004-07-01   1557

국가안보를 대체하는 새로운 안보 개념을

민주주의·인간해방 관점에서 생각하는 안보

주한미군의 감축 움직임이 표면화 되면서 ‘국가안보’를 우려하는 논리를 두고, 국가안보 개념으로는 진정한 평화가 어렵다는 의견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의 유령이 한반도를 휩싸고 있는 것일까.

‘미국-이라크전쟁’(전쟁 주체인 미국이 생략되어 있는 이라크전쟁이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가 우리는 왜 그 전쟁을 이라크전쟁이라고 부를까.)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군을 지원하기 위한 한국군의 파견, 주한미군의 재편.감축을 둘러싼 논쟁에서, 남한 내부의 대부분의 정치.사회세력들은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주한미군의 재편.감축 그리고 110억 달러 투자가 예정된 주한미군의 혁신을 통한 신속기동군으로의 변신을 ‘조국보위’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는 듯하다. 조국보위는 국가안보의 북한판 이름이다. 한반도의 두 국가는 여전히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한반도와 세계를 보려 하고 있는 것일까.

안보에 대한 발상의 전환

새로운 문제설정은 없는 것일까. 냉전시대의 유물인 국가안보와 국가이익 개념에 기대어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일까.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을 둘러싼 논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민주주의 진전을 의미한다. 시민이 접근할 수 없던 성역(聖域)을 부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이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반전.평화운동의 성과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와 시민사회의 소통보다는 국가의 결정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진정한’ 국가이익은 이라크에 한국군을 보내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할 때, 자칫 국가이익이라는 그릇에 누가 물을 채울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 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 게임에서 국가는 항상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주한미군의 재편.감축에 ‘협력적 자주국방’으로 대응하는 것은, 결국 국가가 군사력에 많은 투자를 하면 국가의 안보가 실현될 것이라는 냉전적 발상의 반복이 아닌지. 따라서 자주국방이 북한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에게 군비경쟁을 하라는 신호로 읽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국가안보를 사활적 국가이익과 등치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이 있는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쉬운 질문이 때론 근본적일 때가 있다. 안보란 무엇인가. 안보가 하나의 개념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 필요하다. 미국식 국제정치학의 하위분과인 이른바 ‘안보연구’에서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다. 따라서 전통적 안보연구는 군사력의 위협, 사용, 통제에 관한 연구가 된다. 안보의 대상이 국가일 때, 그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은 때론 군사력처럼 도구화되고 심지어는 적(敵)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우리의 국가보안법을 보라. 안보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개념이 아니었던가. 국가안보 개념으로 국가는 그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안보’를 위협하지 않았던가. 만약 국가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면, 국가안보의 개념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안보의 궁극적 대상은 개개의 사람이 아니던가. 안보가 위협의 부재라면, 그리고 그 위협에는 전쟁뿐만 아니라 정치적 억압, 경제적 빈곤, 사회적 차별 등등이 포함된다면, 한 이론가의 주장처럼, 안보와 해방은 동전의 양면이 아닌가. 군사비를 늘리고 사회복지비를 줄이는 것 또한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가 아닌가. 즉 안보는 해방이다.

누구, 무엇으로부터의 안보인가, 누구, 무엇에 의한 안보인가, 누구, 무엇을 위한 안보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해 보자. 주한미군의 재편.감축은 안보 개념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 재편.감축이 미국의 이해 때문이든 아니면 우리 내부의 민주화의 결과든, 국가안보 개념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경로를 상상해 보자.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자. 국가안보 개념이 주는 부정적 효과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힘의 불균형에 때문에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소국(小國)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안보를 위해 국가안보의 개념을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남북한의 정책은 동맹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제 동맹의 상대방이 “동맹은 연애결혼이 아니라 편의에 따른 동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의 말처럼, 무조건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기로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구상처럼 미국, 일본, 한국의 지역동맹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지역동맹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지역동맹이 결성되고 한국군조차 미국의 신속기동군의 일부로 편입된다면, 원하지 않은 갈등에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갈등의 현장이 한반도라면, 동맹이 안보의 위협이 되는 역설적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국가안보를 지키려다 국가와 그 주민의 안보가 상실될 수도 있다.

시민사회, 협력적 안보.공동안보의 토대 구축

국가안보를 대체하는 새로운 안보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유용한 대안일 수 있다.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 사이의 협력적 안보나 공동안보가 그 사례다. 소국의 경우 국방비의 증액으로 안보를 지키려다 주변국의 경쟁적인 대응으로 오히려 안보에 대한 위협이 가해지는 역설적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우리의 중단기적 선택지가 될 수 있는 대안이다. 주한미군의 재편·감축을 남북한 군축과 평화체제의 건설 그리고 동아시아 다자간 안보협력을 위한 계기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민사회의 개입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안보의 궁극적 대상인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국가 내부에서 안보의 실현과 국가를 넘어서는 적극적 연대를 통해 협력적 안보와 공동안보의 토대를 구축할 때, 힘의 국제정치를 넘어서는 대안의 정치공동체는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안보 없이 평화 없다’는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평화 없이 안보 없다’는 인식의 전환이 수반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의 개념에 기대어 한반도와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상상이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안보의 영역에서도 민주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안보를 해방의 동의어로 만드는 것, 궁극적으로는 안보의 개념을 폐기하고 협력과 평화의 개념으로 우리의 세계를 설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낡은 것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인식의 나침반이 아닐까.

구갑우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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