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5월 2019-05-02   3259

[특집] 플랫폼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약

특집4_플랫폼, 노동의 기회인가 위기인가

플랫폼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약

글. 장흥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1942년 발표된 ‘베버리지 보고서’의 정식 명칭은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였다. 공공부조 중심의 영국 복지를 사회보험제도 중심으로 전환하자는 것이 베버리지 개혁의 핵심이었다. 베버리지 복지국가에서 사회보험이 빈곤을 사전에 예방하는 제도였다면, 공공부조는 사전 예방에도 불구하고 남은 빈곤에 대한 사후적이고 잔여적인 구제책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보험의 원리는 위험의 분산이다. 그런데 만약 경제인구의 절반이 실업자 신세이거나 성인 인구의 절반이 암 환자라면 실업보험, 의료보험 같은 사회보험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보험 중심의 베버리지 개혁은 위험을 일정 한계 이하로 묶어두는 장치를 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장치는 바로 완전고용이었다.

 

베버리지 복지 개혁을 전후해 유럽과 미국의 복지국가 수립 과정에서 완전고용은 사회경제정책이 추구하고 달성해야 할 중대한 정책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해체를 목적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만연한 실업과 불안정노동은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정책과 긴장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 긴장의 표현으로서 긴축의 일관된 메시지는 복지 의존을 줄이고 노동조건이 어떻든 일자리를 구하라는 것이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통권 265호)

1942년 영국 공무원이자 학자인 윌리엄 베버리지가 사회보장 제도 확대를 위해 구상한 베버리지 보고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었다. 궁핍(want), 질병(disease), 무지(ignorance), 불결(squalor), 나태(idleness) 다섯 가지 악에 대항하여 사회보험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연한 실업과 완전고용 기반 복지의 모순

그러나 일자리 사정은 악화되는 추세다. OECD 회원국 평균 실업과 실업급여 수급자 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을 기준으로 모두 대략 50% 정도 증가하였다. 1년 이상 장기 실업률은 거의 2배 늘었다. 실업수당의 수급 조건이 악화되고, 근로장려세제(EITC)와 같이 공적 소득 이전을 노동 조건부로 하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가 강화되는 것은 기왕의 실업보험이 더 이상 보험 기능을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을 보여준다.

 

복지국가라는 건물의 지반이 침식하는 가운데 정보기술 혁명이 추동하고 수립한 플랫폼 경제는 복지국가에 어떤 의미일까? 플랫폼 경제의 작동 원리, 일자리와 소득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전망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실행 가능하고 해방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미래를 추구하는 데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 경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을 떨어뜨리고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첫째, 플랫폼 경제에서 일자리의 총량과 일자리의 질은 하락할 것이다. 기술 혁신의 일자리 효과에서 기술이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를 대체 효과,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 효과를 생산성 효과라고 한다. 인공지능(AI) 등 자동화 기술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은 대체 효과를 상쇄하는 생산성 효과를 근거로 한다. 이런 전망에는 자주 역대 산업혁명의 경험이 근거로 활용된다.

 

그러나 플랫폼 경제가 밀고 가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일자리 효과를 역대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고찰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거대 플랫폼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일자리가 전통적 다국적기업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점부터 지적하자. 1962년 전성기의 AT&T는 56만 4천명, 엑손 15만 명, GM 60만 5천명의 임금노동자를 두었다. 반면 구글과 페이스북의 직접 고용인력은 각각 6만 명, 12만 명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은 자동화 기술의 진전으로부터 나온다. 현재의 범용 AI와 산업로봇의 발전은 업종과 산업, 숙련도와 임금 수준을 가리지 않고 인간 노동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의 조사에 따르면, 모든 미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합산한 총 노동시간은 2013년 1,940억 시간으로 1998년의 그것과 동일하다. 같은 기간 미국 인구는 4천만 명이 증가했고, 인플레이션 조정을 거친 생산량(output)은 42% 성장했다. 이 통계의 함의는 정보기술 혁신으로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대다수가 전일제 정규직 노동보다 시간제 불안정 일자리라는 기왕의 수많은 연구를 지지한다. 

 

새로운 사회계약의 기초로서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회보장

둘째, 플랫폼 경제는 기존의 소득 분배 메커니즘을 교란시키고 이에 대한 정책 대응을 갈수록 어렵게 만든다. 네트워크 효과를 겨냥한 플랫폼기업들의 전형적인 교차-보조금(cross-subsidization) 정책은 기술 스타트업에 대한 끊임없는 인수합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경쟁의 효율성 제고를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경쟁 정책은 독점이 오히려 높은 생산성으로 나타나는 플랫폼의 성격 때문에 적극적인 반독점 정책을 구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법인세 과세 요건인 물리적 고정사업장 없이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IT서비스의 성격과 플랫폼 기업들의 적극적인 조세회피 전략이 결합한 결과, 거대 플랫폼기업들의 법인세 납세 실적은 전통적인 다국적기업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다. 반면 이들 기업에 대한 국제적 과세 대응은 더디고 앞으로도 성공을 낙관하기 어렵다. 긱(gig) 노동, 주문형(in-demand) 노동, 크라우드(crowd) 노동 같은 새로운 용어들은 플랫폼 경제가 만드는 새로운 노동 형태를 대표한다. 이들 노동에 대해 노동자성 인정이라는 기존 정책의 실효성은 현저히 약화된다.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맥도널드는 이미 1990년대에 매장의 전체 과정을 완전 자동화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맥도널드에게 완전 자동화는 기술적 가능성보다는 재무적 비용 효과와 관련된 문제였다. 오늘날 많은 산업 부문에서도 그러하다. 플랫폼 경제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실업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미래 전망에서 최저임금과 같은 임금 인상과 자동화의 관계는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2013년 여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패스트푸드 거리에서 서비스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을 벌일 때, 사용자단체를 대변하는 한 연구소는 <월스트리트저널>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은 광고물을 게재했다. “파업은 경영과의 전쟁이 아니라 기술과의 전쟁이다.” 맥도널드는 이미 1990년대에 매장의 전체 과정을 완전 자동화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맥도널드에게 완전 자동화는 기술적 가능성보다는 재무적 비용 효과와 관련된 문제였다. 오늘날 많은 산업 부문에서도 그러하다. 플랫폼 경제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실업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근대 국민국가를 제외하면 복지국가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사회계약이라 불릴 만한 체제였다. 이 체제에서 완전고용은 단지 사회보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기초만이 아니라 노동권 보장과 연계되어 임금이 자동 인상되는 기제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깨졌고 플랫폼 경제에서 더욱 악화될 완전고용에 기대서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표된 다음 해 베버리지와 동시대 인물이자 사회운동가인 줄리엣 리스윌리엄스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한 제안>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베버리지 계획의 난점을 오늘날 ‘실업의 덫’, ‘빈곤의 덫’으로 알려진 개념을 사용해 비판한다. 그 역시 노동 윤리에 갇혀 있었던 점이 시대적 한계라면 그가 새로운 사회계약의 원리로 ‘보편적 수당’을 제안한 것은 시대를 선취한 것이다. 

 

플랫폼 경제 시대에 줄리엣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회계약은 새로운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 기반은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과 함께, 실업의 덫, 빈곤의 덫을 제거하기 위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소득 보장일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에 갇힌 노동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으로 확대해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하는 사회계약 플랫폼이 될 것이다.  



 

 

특집. 플랫폼, 노동의 기회인가 위기인가  2019년 5월호 월간참여사회 

1. 승강장에서 SNS까지, 플랫폼이란 무엇인가 윤상진

2. 한국의 플랫폼노동 실태와 사회적 책임 김성혁

3. 플랫폼경제, 상생의 공유와 승자독식 사이 이광석

4. 플랫폼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약 장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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