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9월 2020-08-28   711

[여는글] 집은 집(集)이지, 집(執)이 아니다

여는글

집은 집이지, 집이 아니다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초입에 있는 만해마을에 볼일이 있어 사나흘 머물고 밤늦게 내가 사는 지리산 절로 돌아왔다. “아, 내 집이 좋기는 좋다.” 방에 들어와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내 집이 좋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것은 구체적 경험에서 나오는 느낌이고 판단이기 때문이다. 

 

집! 하면 먼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아마도 ‘편안’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일 것이다. 피곤하고 지친 내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팔다리 쭉~ 펴고 쉴 수 있는 곳, 매무시를 단정하게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한 곳. 그래서 일과가 끝나면 깃들고 싶은 곳,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들어가서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집이다. 그렇게 집은 사람에게 안전하고, 안정적인 보금자리다. 그래서 내 지인은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라고, 제법 의미 깊은 책 제목을 지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안전해야 할 것이다. 온갖 비바람이 들이닥치지 않고, 맹수와 해충으로부터 안전하고, 추위를 막고 더위는 피할 수 있는 곳이 집의 최적 조건이다. 선사시대부터 집은 그런 필요에 의해 거의 본능적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동굴이 그렇고 움막이 그렇다. 새들과 발이 달린 짐승들의 귀소도 안전이 바탕이었다. 신체의 안전은 곧 마음의 안정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안전하고 안정적인 곳에서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먹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고, 말하고,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잤다. 집은 모든 사람들이, 온갖 사연들이 모이는 ‘집(集)’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하략)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백석에게 집은, 온갖 삶의 서사가 모여 살아가고 온기 있는 공간이다. 벽이 있는 집은 ‘다 낡은 무명샤쓰’로 상징되는 남루한 삶도 편안하게 쉬는 곳이며, 따뜻한 감주 한잔에 외로운 삶을 달랠 수 있는 집이다. 또 흰 바람벽이 있는 집은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추운 날에도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며 가족들을 위해 무와 배추를 씻는 사랑이 넘치는 집이다. 집은 그렇게 사랑이 모이고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다.

 

그런데 오늘날 집은, 몸과 마음과 가족과 이웃과 사랑이 모이는 ‘집(集)’의 기능을 침범당하고 있다. 사람의 휴식과 인정이 모이는 집이 아니다. 일확천금을 움켜잡는 ‘집(執)’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집은 안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말은 거창하게 재테크라고 하지만 실은 머리 굴림과 돈 장난에 의해 집의 존재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불안하면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수용 공간에 가깝다. 집이 거주 공간이 아니라 투기 대상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집은 괴물처럼 변신하고 아귀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다. 불안해진 우리 시대의 집들은 이제 ‘주거 신분 사회’를 탄생시켰다. 공용 임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과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질감, 혐오감, 적대감, 우월감, 열등감으로 두터운 벽이 생겼다. 우리 시대의 집은 지친 그림자가 쉬고, 따뜻한 감주 한잔과, 마주 앉아 대구국을 먹는, 든든한 바람벽이 아니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렇다. 돈 때문에 이제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도 빼앗겼다. 돈 때문에 가슴 뜨거운 것도 호젓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오로지 평수와 값으로 존재하는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상한 유민流民이고 난민難民일지도 모른다.

 


글. 법인 스님 월간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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