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2239

계룡산 “한밝은 마음학교” 유인학 교장

이름 없이 살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 땅의 이인(異人)들. 그들은 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은은한 빛으로 세상을 밝힌다. 본지는 신년호부터 영혼이 맑은 반도의 이인을 찾아나선다. 첫번째로 깨지고 일그러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주는 ‘한밝음 마음학교’ 유인학 선생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무협지에나 나옴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185㎝의 훤칠한 키에, 명민해 보이는 길고 검은 얼굴. 충남 계룡산 갑사에서 만난 유인학 ‘한밝음 마음학교’ 교장(49세)의 살아온 이야기는 직접 보지 않고 믿는 것처럼 허황된 게 없다고 생각해온 필자에게 경이롭게만 들렸다.

화탕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1977년부터 충남 논산 쌘뽈(Saint Paul)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유인학 선생은 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해직됐다. 그 잡지에 글을 쓰고 좌담회에 한 번 참석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85년 학원안정법이 만들어지면서 교단에 있는 빨갱이 교사들을 몰아낸다는 미명 아래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때는 이념서적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감옥에 갔으니까. 초창기 사회주의 관련 서적은 번역된 것도 없어서 죄다 원서로 공부했다구요. 그것도 가지고 있다 들통나면 큰일이죠.”

73년 대학에 다닐 때에도 삭발에 단식까지 하면서 유신반대시위를 주도했던 그라 그 동안에도 고향집에는 경찰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해직된 지 20일쯤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얼마나 미안해. 평생 농사지어 가르쳐놨더니 데모나 하고, 학교에서 잘리기나 하고. 면목이 없지 뭐. 그래서 한 달쯤 있다가 산에 갔어요.”

그는 그전부터 계룡산을 자주 올랐다. 나무, 물, 새, 짐승, 곤충들과 하나가 되어 노니는 게 좋았다.

“제가 잘 다니던 곳이 계룡산 문필봉 너머 골짜기인데 그곳은 하루종일 등산객이 한 명도 안 다녀요. 다람쥐, 나비, 잠자리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새가 머리 위에서 놀아요. 그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그야말로 평화를 느꼈지요. 그런데 산을 내려가면 운동권사회를 비롯해 인간사가 너무 복잡한 거야. 김종철 교수님이 세상을 화탕지옥이라 표현하셨던데 내가 있던 산 속은 천국이었던 거죠.”

천국이나 다름없는 산 속에서도 고민은 싹텄다. 사회변혁운동도 뭇생명을 사람처럼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자세로 할 순 없는 걸까. 풀벌레 하나에도 애정을 갖고 귀하게 여겨야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친구들이 저더러 자연주의자라고 했어요. 그때는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었어요. 혁명을 꿈꾸는 유물론자에게 자연주의자라니. (웃음) 도청을 피해 산에서 세미나를 하던 친구들이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 제가 막 핀잔을 줬죠. 하기야 인간 사이에도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인간과 다른 생명 사이야 오죽하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다른 생명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데 어떻게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인지 저는 치열한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틈틈이 에리히 프롬의 『파괴란 무엇인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시튼의 『동물기』 같은 책을 읽었어요.”

그의 남다른 자연 친화력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다. 여섯 살 때 그는 여느 시골집 아이들처럼 꼴을 베어 큰집 소에게 먹이면서 소와 친해졌다. 그렇게 사귄 소가 병들어 큰집에서는 잡기로 했다. 개울가 감나무에 소를 묶어 두고 마을 사람들은 빙 둘러서서 군침을 삼켰다. 그 때 소 울음소리가 어떻게나 가슴을 후벼파던지 그 뒤로는 소 생각에 그 감나무에 열린 감은 입에도 안 댔다.

“김종철 교수님이 반유신, 계급사회 타파, 민중의식을 갖고 있던 저를 더 성숙한 사상으로 이끌어주셨죠. 오래 전 잊혀졌던 감수성을 되찾아주신 거예요. 모든 생명은 서로 공경하면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 말이에요.”

산에서 만난 스승의 가르침

해직된 뒤 그는 산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산은 그에게 평화도 주었기 때문이다. 산으로 떠날 때 그는 배낭 하나만 든 차림이었다. 하숙방 삼면을 채운 책들은 후배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고 나니 날아갈 듯이 자유로웠다.

“밥해 먹고, 새, 나무, 하늘, 먼 경치 바라보고 낮에는 계곡에서 낮잠도 자고, 목욕도 하고. 조용한 곳에 혼자 있는 게 좋았거든요. 제 고향은 충남 예산에서 가까운 곳인데 좌우 사상의 대립이 치열했어요. 형제간에도 이를 갈고 싸우고 살벌한 말들을 했죠. 때려, 죽여…. 그런 게 너무 싫어서 어릴 때부터 뒷동산에 혼자 올라가곤 했어요. 산 속에 있으면 저도 그 일부가 되는 게 좋았어요.”

문필봉 능선을 타고 20∼30분 가다보면 바위굴이 나온다. 발치에 배낭 놓고 누우면 딱 맞고, 반듯하게 앉으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의 작은 굴이다. 바위굴이 있는 계곡엔 가끔 참선 수행하는 사람들, 단전 수련하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찾았다. 그들은 어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잠도 안 자고, 단식을 하면서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이었다. 유인학 선생이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도를 이루는 데 관심이 있었다. 세상의 평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유인학 교장도 그들에게 수련법을 배웠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이 산

저 산을 쏘다니다 가끔 한번씩 해보는 정도였다.

그럭저럭 산에서 지내기를 2년여. 당시 고향에 계시던 어머니는 암으로 크게 고생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모실 처지도 못 되어 그는 산 속에서 병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제가 대신 받게 해주십시오.”

그 때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온화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네 어머니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고통받는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드디어 제 정신이 이상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적이 없어요. 그러다 음성이 시킨 대로 해봤어요. 그랬더니 몸의 마디마디가 끊어져나갈 정도로 심한 고통이 왔어요. 그렇지만 너무 신기하게 생각되는 거예요.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했다고 어떻게 진짜 아플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나 이제 간다’ 하는 거예요. 소스라쳐 일어나 산에서 내려와 보니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였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그는 미련없이 바위굴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밖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돌문까지 쌓아놓고 지냈다. 세상과 자기를 이어주던 유일한 끈이 떨어졌으니 더는 세상살이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가끔 물로 목이나 축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바위굴 안에서 내가 죽는다 해도 평생 가슴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가질 사람은 없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여기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또 그 음성을 듣게 된 거예요. 그때는 ‘이제 산을 내려가라’ 그러시더군요. 그때가 대통령 선거를 앞둔 87년이었어요.”

산에서 내려가니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태동된 민주교사협의회(전교조의 전신) 사무실은 공정선거감시단 대전지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DJ와 YS의 후보단일화를 목놓아 외치다 보면 술잔도 날아다니고 꺼이꺼이 울다 웃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선거는 허무하게 끝나고 동지들은 흩어졌다. 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노인의 음성이 계기가 되어 그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운동도 이념적 차원을 넘어 생명해방 차원에서 하고 싶었다.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복직했다.

“친구들은 저더러 황당무계하다고 그랬어요. 사실 그렇지 뭐. 그후 그분의 음성이 몇 번 더 들리더니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다 한라산에서 그분들을 뵈었죠. 세 분이었는데 한 분은 한쪽 눈이 왕방울처럼 큰데, 다른 한쪽은 콩알만큼 작았고, 또 다른 한 분의 귀는 머리 위쪽에 붙었고 다른 쪽 귀는 아래쪽에 붙어 있었어요. … 그분들은 나중에 제게 찬란한 빛으로 승화된 모습을 보여주셨고, 훗날 제가 겪은 일을 글로 세상에 알릴 기회가 주어질 테니 피하지 말라 하시더군요.”

무슨 까닭인지 그는 일면식도 없던 소설가 김성동 씨의 추천으로 『문화일보』 창간호부터 산에서 만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하게 됐다. 7∼8개월 연재한 걸 묶어낸 책이 『성자들의 시대』다. 그후 『우리명산 답산기』를 냈고, 『단전수련의 길잡이』를 펴냈다.

“89년 결혼 이후 궁핍한 살림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신문기고였어요. 그렇지만 저는 신문에 글을 쓸 정도로 실력 있는 작가가 아니었어요. 김성동 선생께서 천거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신문에 나온 제 글은 보지도 못했어요. 부끄러워서…. 그런데 이상한 건 신문연재 이후에 먹고 살 게 떨어지면 또 연락이 와요. 꼭 먹고 살 만큼만 채워져요.”

“낮아지면 행복해요”

99년 그는 몇몇 사람들과 계룡산 갑사 녹수장에 ‘한밝음 마음학교’를 열었다. 이곳은 뭇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스스로 자유롭고 평화로워지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명상과 호흡수련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준다.

“마음학교에 왔던 분 중에 백혈병 환자가 있었어요. 건강한 사람의 혈소판 수는 40만개라고 하는데 그분은 2000개였어요. 마음수련 후 7000개로 늘었어요. 그 정도면 간신히 살 만큼 된 거래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랬어요.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서 그의 혈소판 숫자가 3만9000개로 늘었어요. 그 사람을 8년 동안 봐온 주치의가 골수이식 안 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제는 수술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했대요. 놀라운 변화지요. 마음을 열어 모든 근심을 떨쳐버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병은 마음의 병이라 했던가. 마음을 치유하면 몸도 낫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가 아닐까.

기이한 체험으로 인생이 180도 바뀐 그는 자기를 비우고 몸을 낮춤으로써 평화를 얻으라고 강조한다.

“우주에는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도 있지만 파괴하는 에너지도 만연해 있어요. 정신도 온갖 파장이 같이 얽혀 있는 거잖아요. 나를 비울 때 우주와 내가 하나가 돼요. 조금 높아지려면 누군가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데 그건 하늘의 정신, 아름다운 정신과 반대되는 거예요. 매 순간 마음을 비우고 낮아지고 평화로워져 밥알 하나에도 장엄한 생명이 있음을 느끼고 푸성귀 한 잎을 먹더라도 그 생명력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다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겠어요.

시민운동도 그런 생명원리로 작동됐으면 좋겠네요. 내가 대장 아니면 어때요. 내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또 어때요. 다른 사람이 근사한 역할을 하고 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낮아지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몰라요.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10∼20년 후 그만큼 더 밝아질 거예요.”

그는 글을 쓸 때 꼭 필명을 쓴다. 유인학도 본명이 아니다. 유인학이라는 이름 석 자도 역사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채식을 실천하고 있지만 친구와 밥을 먹는 자리에서 굳이 ‘난 채식하니까 딴 거 먹을래’ 하지 않는다. 정기예금 같은 건 들어둔 게 없고, 한 달치 생활비가 들어오면 그걸 다 쓴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들이 있지만 벌어둔 돈이 없는 게 불안하지도 않다. 필요한 만큼 다시 채워지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간혹 그가 하는 수련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종의 종교단체 아닌가, 하는…. 그러나 그는 건강을 지키도록 도와주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도록 이끌어주고자 하는 것일 뿐, 다른 목적은 없다고 한다. 마음학교를 다녀간 목사님, 스님, 수녀님들도 많다고. 의혹의 시선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상에서 도피하자는 게 아니라 더 지혜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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