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1062

이탈리아 페루지아에서 열린 민중의 유엔대회 참가기

“침묵에서 벗어나라. 지난 시절 유럽에서 벌어진 유태인 학살에 대해 이스라엘을 동정한다. 우리는 9·11 희생자에게 조의를 표명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희생에 대해서도 역시 조의를 표한다. … 테러리즘의 환경은 가난, 점령, 차별, 공격 등이다. … 우리는 (사실을 왜곡하는) 미디어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직접 사람들이 찾아와 현실을 보기 바란다.”(팔레스타인 참석자)

지난해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이탈리아 페루지아에서 제4차 민중의 유엔대회(the 4th Assembly of United Nations of Peoples)가 열렸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국제시민사회와 유럽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대회에는 세계 각국의 NGO 활동가를 포함,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의 목적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 UN 밀레니엄포럼, 포르투 알레그레 세계사회포럼, 제노아 세계사회포럼 등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민사회진영과 지역공동체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초청해 사회운동 간의 연대를 촉진하는 한편, 공동 의제를 개발해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각국 정부, 국제기구 및 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세력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경험과 정보를 공유해 시민사회진영을 강화하는 노력도 중시한다.

행사가 열린 움브리아 지방은 역사적으로 평화에 대해 관심이 높은 곳이다. 십자군 전쟁을 반대했던 성 프란치스코 신부가 살았던 곳이며, 40년 전 파시즘 치하에서 ‘이탈리아의 간디’로 불리는 비폭력주의자 알도 카피티니(Aldo Capitini)가 ‘페루지아-아시시 평화행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페루지아는 1980년대 유럽지역에 대한 미국의 미사일 배치에 맞서 인간사슬잇기를 시작한 곳이다. 1990년대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촉구하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 마피아의 조직 범죄를 반대하기 위한 인간사슬잇기도 열렸다. 이를 시작으로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 정착을 위한 행동에 참여했다.

이런 역사적 전통 속에서 이탈리아 지방정부조정위원회는 세계 각국의 민중들이 토론하고 실천하는 장으로서 ‘민중의 유엔대회’를 조직했다.

콜롬비아 내전으로 매년 4만 명씩 죽고 있다

행사 첫날은 대회소개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21세기 유럽의 역할, 국제 민주주의 등의 주제 발표가 있었다. 이어 세계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이 자기를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둘째 날은 지구적 시민사회 형성, 세계화시대 지방정부의 역할, 국제민주주의, 유엔 개혁과 지구적 통치, 세계 개발과 경제 정의를 위한 유럽적 제도와 정책, 21세기 갈등과 유럽과 서구, 물·식량권·빚 청산 등에 대한 토론회와 워크숍이 진행됐다. 마지막 날은 ‘유럽을 넘어’라는 제목으로 유럽의 역할에 대한 전체회의’가 열렸고 `세계시민사회의 형성을 위한 공동의 가치, 제안과 행동’에 대해 논의했다.

대회 참석 기간 내내 세계 도처의 분쟁 현장에 있는 느낌이었다. 이탈리아 밖에서 온 참석자의 대부분이 분쟁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단,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 콜롬비아 등 내전과 전후 복구과정에 있는 나라와 인도네시아의 마루코, 모로코의 식민지인 사하라 남부지방,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참석을 했고 미얀마에서 온 망명객, 체첸인, 쿠르드인 등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망명한 마리암 라지미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압살되고 있을 때 세계는 어디에 있었는가, 누가 극단주의를 지원했는가”라며 아프가니스탄의 인권유린 실상을 고발하는 한편, 탈레반의 형성을 지원한 서구 국가들을 비판하고 전쟁반대를 호소했다. 콜롬비아에서 온 참석자는 내전으로 인해 매년 4만여 명이 죽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들의 피해가 크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 참석자는 중동의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민족 두 국가’를 건설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마루코와 사하라 남부지방에서 온 참석자들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과테말라에서 온 참석자는 분쟁 이후 국가재건 문제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테러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테러리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누가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통해 테러 국가를 지원하는가’ ‘그 동안 강대국이 저지른 국가테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적극적인 비폭력적 방식만이 세계를 바꿀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 공정경제, 평화의 권리가 절실하다’ ‘우리는 부시도, 오사마 빈 라덴도 아닌 제3의 길에 있다’ ‘빚 청산이 새로운 세계의 핵심이다’ ‘식민주의, 인종주의, 세계은행 등이 분쟁의 원인이다’ 등이 참석자들이 발표한 주요 내용들이었다.

참석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 세계시민사회와 유럽의 역할’이라는 최종문서에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과 테러 종식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 해소 △민주주의의 세계화 촉진 등을 주요 방향으로 설정했다. 또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럽의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세계시민사회 건설을 위한 3가지 길로 평화, 정의로운 경제 개발, 국제적 민주주의와 인권 문화 건설 등을 제시했다. 또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법의 존중, 군비 감축 등을 각국 정부와 의회에 요구하고, 전쟁 종식과 전쟁 희생자 지원 및 평화 문화 확산 등에 각국 시민사회단체들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페루지아에서 아시시까지 평화의 물결

대회 기간 내내 가슴 속에 맴돌던 생각은 필자가 미국중심의 정보에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다. 필자는 9·11 테러이후에 미국의 보복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틀이 이 대회를 통해 형성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참석했다. 여러 발표자들이 9·11테러와 미국의 보복전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국 참석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에 이미 여러 나라에서 전쟁이 진행중이라는 반응들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또 하나의 전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죽음은 무기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많은 참석자들의 생각이었다. 분쟁지역에서 온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분쟁에는 둔감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언론에 대해 약간 냉소적이었다.

내가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거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고통보다는 CNN을 통해 직수입되고 있는 미국의 전쟁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닌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처지가 미국과 관련된 사안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시야를 세계로 넓혀 ‘들리지 않는’ 분쟁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이런 반성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것은 대회 다음날 열린 ‘페루지아-아시시 평화행진’에서 받은 감동이다. 이 행진에는 대회 참가자들은 물론 보이스카우트, 가톨릭 성직자, 노동자, 정당원, 쿠르드계 이민자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온 20여만 명이 참가했다. 이탈리아 보수세력은 7월에 있었던 제노아 사회포럼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한 뒤 이전보다 강도높게 평화행진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이탈리아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지하는 상황이라 이번 평화행진은 평화와 평등, 해방을 향한 이탈리아 국민들의 뜨거운 염원을 담고 있었다. 20여만 명이 평화행진에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부러움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세계인들의 의지가 모이는 ‘평화의 행진’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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