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1630

테러리즘의 이중성과 외면당하는 인권

전세계가 미국으로부터 테러리스트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미국 편에 설 것이냐의 입장표명을 강요당했다. 이런 판국에 너도나도 테러리즘에 대한 반대를 선언하고 나섰다. 여기엔 테러리즘은 무조건 악이고, 다른 쪽은 선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박멸해야 할 대상인 테러리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국가들이 하나같이 테러 근절을 외치고 있으니, 아마도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테다. 힘센 나라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동참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갈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하거나.

한 쪽엔 테러, 다른 쪽엔 해방투쟁

지난 10월 초 열린 제56차 유엔총회의 논의주제는 단연 테러근절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테러리즘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논의가 잠시 이뤄졌다. 쿠웨이트 정부대표는 테러리즘은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테러리즘과 자결권 쟁취를 위한 인민들의 투쟁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덧붙여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어떤 상황에서도 테러의 일종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뒤질세라 이스라엘 정부대표는 “다양한 테러들을 구별하려는 것은 아무리 고상한 말로 표현할지라도 (테러로)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부룬디 정부대표는 “어떤 행위가 한 곳에선 테러로 비치고, 다른 곳에선 해방투쟁으로 비친다”며 이러한 상황을 묘사했다. 그건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1932년 일제에 항거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이나 1985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규명 및 사과를 촉구하는 대학생들의 미국문화원 점거사건. 일본이나 미국은 이것들을 자국민을 위협하는 테러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과연 테러리즘이란 무엇인가

한 철학사전에선 테러리즘을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체계적인 협박의 사용. 광범한 대중들 사이에 공포를 조성함으로써 상대가 요구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유엔인권기구 안에선 테러리즘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지난 8월 유엔인권소위에 제출된 보고서 ‘테러리즘과 인권’은 테러 행위자를 중심으로 테러에 대한 개념 규정을 시도했다. 크게 나누어 보자면 국가 테러와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테러가 있다. 국가테러는 1790년대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억압과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체계적 폭력을 사용했던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로부터 유래한다.

반면, 비국가 행위자의 테러라는 개념이 출현한 것은 한 세기 후로,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인이나 집단이 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전술로서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짜르 체제의 러시아에서 시작돼 곧 유럽과 미국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테러의 동기, 전술도 많이 변화했고, 이에 따라 국가테러와 비국가 행위자의 테러라는 각각의 개념도 많이 확대되고 변화했다.

국가테러는 정치적 반대자를 경찰이나 비밀요원, 군대를 동원해 납치하거나 암살하는 것, 재판 없이 수감시키는 것, 고문, 인종적·종교적 소수자 혹은 특정 사회계급을 집단 학살하는 것 등의 모습을 띤다. 이런 국가테러는 주로 권위주의적 정권이 의존하는 수단이긴 하나, 민주적이라 분류되는 정부들도 ‘비상’ 상황이라고 판단한 때에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국가테러를 활용하곤 한다. 테러 위협에 대응하겠다는 것이 국가테러로 이어지는 일도 적지 않은데, 이는 곧 국가에 의한 테러와 국가에 대항하는 테러가 반복되는 결과를 낳는다. 비국가 행위자의 테러는 좀더 복잡하다. 테러의 대상이 특정 정부뿐 아니라 다른 종교집단이나 계급일 수 있고, 목적도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것에서부터 정권을 장악하는 것, 외세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쟁취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테러의 주체도 민족주의자, 종교집단, 좌파, 우파 등 하나로 규정짓기 어렵다.

결국 이런 설명도 유형 분류는 될지언정 테러리즘의 정의를 밝혀주고 있진 못하다. 이에 대해 보고서의 작성자인 특별보고관 칼리오피 코우파(Kalliopi K. Koufa)는 솔직히 고백한다. “테러리즘이란 단어는 거의 언제나 주관적인 판단을 동반한다”고. 워낙 저마다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이 존재하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어떻게 테러리즘을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대테러 전쟁은 인권에 대한 공격을 포함한다

문제는 이처럼 정의조차 분명치 않은 테러리즘을 일제히 악으로 규정하고, 거의 모든 나라들이 대테러 전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한 전쟁이 얼마나 부도덕한가는 여기서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아프가니스탄 전쟁만큼 피가 난무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세계각지에서 대테러 전쟁의 일환으로 인권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11일 미국 세계무역센터 공격 직후, 각국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법안 및 조치들을 논의하고 있거나 이미 승인했다. 각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조치들을 보면,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정치적 반대자를 잡아 가두고 시민들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까지도 처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고 있다.

지난 9월 미국 행정부는 증거 없이도 테러단체와의 관련 혐의가 있는 이민자들을 무제한 억류할 수 있는 권한을 의회에 요청했다. 또 이번에 새로 제안된 대테러 법안에는 ‘테러리즘’의 정의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비폭력적인 활동까지도 추방 가능한 범죄로 삼고 있다. 도청에 대한 제한도 완화됐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러시아 법무장관도 최근 ‘테러와의 전쟁’을 강화하기 위한 법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테러리스트와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가 있으면 기소 없이도 30일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등지에서는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가 있을 거라는 의심만으로 중동 출신 사람들이 구금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문제들에서 예외가 아니다. 법무부는 지난 9월 16일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분류한 6개 국가의 국내 체류민 159명에 대한 동향 파악에 착수했고, 불법체류중인 아랍인 4명을 강제 출국시켰다고 밝혔다. 이뿐 아니라 테러방지법 제정 또한 추진한다고 하니, 어떤 내용이 포함될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지고 있다. 특별보고관 칼리오피 코우파는 앞서 언급했던 보고서에서 대테러 법안이 인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는데 그것이 지금 세계각지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국민을 테러로부터 보호하겠다면서, 사실은 이민자들 및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테러와의 전쟁’이 빚어낸 오늘의 모습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제껏 국가안보 논리 속에 지속되어왔던 인권침해와 억압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 테러리스트이자 그의 동조자로서 감시당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인종적, 종교적 편견과 더불어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테러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더 이상 인권을 희생시키는 구실이 되어선 안 된다.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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