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605

가난한 나라, 그러나 나눔의 공동체는 살아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상대를 파악하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몇 초 내에 이미 우리 안에 내재화된 인식경로를 통해 상대를 가늠해 버린다. 간혹 이런 의문이 든다. 우리는 상대가 얼마나 잘 사는가를 몇 초 내에 판단하고,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이것은 개인과 개인 간뿐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의 모든 면이 1인당 국민소득으로 판단된다. 그 나라의 문화나 사회시스템이나 개인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느끼는 행복지수 따위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에 와 있는 제3세계 외국인노동자들은 푸대접받기 일쑤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대할 수 있는 건 그 나라보다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낫다는 우월감 때문이다. 잘사느냐, 못사느냐는 경제력으로 모든 것을 잣대질하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 스리랑카에선 부자 출신

지난해 11월 25일,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도착했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통해서도 입증됐다. 어스름 새벽에 스치는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하다’라는 것을 머리 속에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콜롬보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감파하(Gampaha) 지역으로 이동했다. 출국하기 전에 한국에서 일했던 스리랑카 외국인노동자의 연락처를 소개받았는데, 내가 스리랑카에서는 아는 사람이라곤 그밖에 없었다. 그는 감파하에서 30여 분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었다. 나로선 한국에서 일했던 외국인노동자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한국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얼굴이 시커멓고, 못사는 나라 출신.

그러나 집 앞에 도착한 후 너무 놀랐다. 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카탈로그에서나 봄직한 서구식 건축양식을 따른 흰색 가옥구조에다, 정돈이 잘 된 넓은 마당, 집 옆으로는 코코넛 나무들이 늘씬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티야(27세)였다. 그는 나를 가족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가족은 이제는 스리랑카에서도 보기 드문 대가족이었다.

할머니, 부모님, 결혼한 누나 부부와 아이들, 그리고 마티야의 세 형제, 게다가 결혼한 누나의 시어머니까지. 딸의 시부모까지 한 집에 들어와 사는 모습은 모계혈통이 조금 남아 있는 흔적이다.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티야는 가족을 소개하자마자, 자신의 친구인 우불(31세)의 집으로 가자면서 자동차 한 대를 마당으로 몰고 왔다. 차고에는 그 자동차 외에도 한 대의 자동차가 더 주차되어 있었다. 이렇듯 가난하다고만 생각했던 외국인노동자 마티야의 집은 감파하 지역에서 부자에 속했다.

우불 또한 한국에서 3년 동안 일한 경험이 있었다. 현재도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 덕택에 한국인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마티야보다는 한국어에 익숙한 우불을 만나 스리랑카의 정치·문화에 대한 얘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하루만 묵고 떠나려는 기자에게 우불은 “내일 마티야 집에서 좋은 일이 있으니 같이 하자”고 권유했다. 그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마티야의 누나인 자마리(30세)의 아들 마신두(2세)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제 세 살을 맞는 아이의 생일잔치라는 것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선물이라도 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가 일정을 조금 변경하여 다음날 감파하 지역의 특산물 공장과 어시장으로 유명한 네곰보(Negombo) 시를 돌아보기로 하고 하룻밤을 더 머물렀다.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는 생일잔치

다음날 네곰보 어시장을 돌아보고 마티야 집에 도착한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주인공인 마신두의 고조할머니, 외할머니, 친할머니, 어머니 네 명의 여자가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의 생일상이 너무 거창하다 싶었다.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일잔치를 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고아원에서 한단다. 그리고 보니 이 음식 준비는 고아원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삼십 여 명이다 보니 음식의 양이 삼십인분쯤 되는 것 같았다. 고아원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건 특별한 종교적인 의미라도 있어선가?

“우리나라는 가난합니다. 마신두는 부모가 있지만 그 아이들은 부모가 없어요. 같이 나누어 먹어야죠. 물론 요즘 스리랑카에서는 부자들이 아이 생일파티를 집에서 자기들끼리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보다는….”

마티야의 가족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역공동체에서 같이 나누지 않고 자기 아이만을 위해 집에서 가족들과 생일파티 하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고아원으로 출발할 시각이 임박하자, 인근 동네에 사는 친척들이 모였다. 더러는 공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장에 다니는 이는 조퇴를 하고 왔다고 했다. 그들이 이 잔치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동차 세 대에 나눠 타고 20여 분을 달려 고아원에 도착했다. 고아원 원장 사무실에 걸려 있는 흰 칠판엔 싱할리어로 마신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신두의 이름 위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침에 이미 누군가가 마신두처럼 생일잔치를 이 고아원에서 하고 간 것이다. 마신두의 이름 밑엔 저녁에 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자들이 가지고 온 음식들을 내리고, 여자들은 접시에 음식들을 똑같이 나누어 담았다. 그 시간 동안 마신두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잡고 고아원을 둘러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상차림이 끝나자 아이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마신두의 삼촌이 마신두를 안고 음식을 먹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같이 얘기를 나눈다. 할머니들은 행여 음식이 부족하지 않을까 살피며 아이들에게 더 먹으라고 권한다.

이렇게 점심식사를 끝내고, 넓은 장소로 이동하여 준비해온 생일선물을 마신두가 아니라 고아원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마신두에게 주는 생일선물은 물질이 아니라 이 행사의 모든 것이었다. 그 아이가 받은 선물이라곤 없었다. 고아원 아이들에게 돌아간 생일선물은 책, 노트, 연필 등 학용품이었고,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직접 주었다. 그렇게 생일잔치는 끝났다.

물론 이것은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이나 예산이 미흡해서 개인적인 독지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고아원이 국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처지다 보니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은 관례라고,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사회에 던지는 의미가 크다고 여겨졌다.

자신의 아이만 공부 잘 하고, 잘 먹고, 출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부모들에게도 이 작은 잔치는 다시 한번 우리의 척박한 문화를 되돌아보라고 재촉한다.

지역공동체에 기여하고 함께 나누는 문화, 우리보다 더 못사는 나라 스리랑카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과연 잘 산다는 게 무엇일까.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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