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2월 2002-02-01   1415

아시아 최소국 동티모르의 빛나는 독립투쟁

아시아 최소국 동티모르의 빛나는 독립투쟁


지난 500여 년 간 동티모르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독립이, 오는 4월 13, 14일의 대통령선거를 거쳐 5월 20일 독립기념일 선포로 드디어 성취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동티모르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82년 5월 4일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회원국가 원조처의 아시아국장들과 함께 동티모르 평화정착을 위한 조사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도 딜리에서 동쪽으로 200㎞ 떨어져 있는 동티모르 제2의 도시 바카오까지 지프 5대에 나눠 타고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호위 속에서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밀림과 자갈길을 달렸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일행은 나중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벨로 주교의 관저를 예방하기도 했다. 티모르족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진정한 평화는 총칼이 아니라 대화로만 달성할 수 있다고 했던 벨로 주교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를 보면서 종교는 억눌리고 짓밟힌 사람들의 대변자가 될 때 가장 힘이 있다고 느꼈다. 당시 우리는 힘없는 야미족의 게릴라전으로는 강대국 인도네시아의 군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는 불가능할 테니 인도네시아에 국제적인 압력을 계속 행사해 자치령으로라도 승인받도록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마침내 독립을 한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가톨릭과 이슬람의 끊임없는 갈등

동티모르는 어떤 곳인가. 16세기 초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산달나무(Sandal Wood)라는 향내 나는 나무숲을 차지하기 위해 티모르 섬에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산달나무숲이 있는 동티모르는 포르투칼이, 서티모르는 네덜란드가 차지하게 된 것이 기나긴 식민지 역사의 시작이다. 500년 간 실질적인 종주국이었던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에 가톨릭을 전파한 것말고는 이 척박한 땅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동티모르가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제2차세계대전중 오스트레일리아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이곳을 전략적 완충지대로 설정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의 막강한 군대는 이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고, 이로 인해 동티모르인 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동티모르 전체인구의 10%나 되는 수였다. 1945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일본으로부터 오랜 염원이었던 독립을 쟁취하지만,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에 계속 주둔했다. 마침내 포르투갈이 자국 내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동티모르를 포기하고 철수한 게 1974년의 일이다.

그러나 500년의 긴 식민역사가 끝났는데도 티모르인들은 독립의 기쁨을 잠시도 누릴 겨를이 없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정치지도자 중 몇 사람이 마르크시즘으로 기우는 것을 막는다는 구실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쳐부수고 1975년 새로운 식민세력으로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침략으로 20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또 희생됐다.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유엔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고, 1999년까지 독립을 위한 게릴라전이 끊이질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인도네시아 군대에 희생당했음은 물론이다.

인도네시아는 24년의 통치기간중 티모르 원주민인 야미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자바 섬의 인구 과밀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인구이동정책을 실시했다. 주로 자바 섬에서 독실한 이슬람 신자 가족들을 엄선하여 반강제로 이민시켰다. 그 결과 가톨릭을 믿는 티모르족과 이슬람교를 믿는 자바족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자바 이주민 편을 들었다.

인도네시아는 티모르에 대해 언어말살 정책도 강행했다. 원주민 언어인 테툰어는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고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대신했다. 나는 동티모르를 방문할 때마다 딜리의 호산나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1980년대에는 오전 10시 인도네시아어로 진행되는 예배에는 소수의 신자들이 참석하는 반면, 오후 2시 테툰어로 진행되는 예배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는 이 비율이 역전된 것을 보면서 16세기에서처럼 20세기에도 교회가 식민화에 앞장서고 있음을 실감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소수민족의 모국어 말살에 협조했다는 말이다.

인도네시아는 또 독립투쟁을 벌이는 게릴라들과의 접촉을 차단하

기 위해 티모르에 문명인의 삶을 선사한다는 미명 아래 밀림에서 살아온 야미족을 평지의 새로운 촌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나를 안내했던 인도네시아 NCC 직원 구스타프는 “야미족은 틈만 나면 밀림으로 도망간다”고 했다.

4가지 공용어, 언어소통도 심각

그러나 국제사회는 동티모르의 자치를 지원하는 국제 NGO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인도네시아의 개발정책이 티모르인들의 삶을 향상시켰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선전과 로비에 현혹되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정책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고, 티모르인들의 독립의 꿈은 잊혀져 갔다. 국제사회가 잊혀졌던 동티모르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1991년 동티모르 독립투사의 영결식에서 독립을 요구하던 100여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인도네시아 군대에 무참하게 죽음을 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어 1996년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힘써온 벨로 주교와 호세 라모스 호르타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세계는 다시 동티모르의 자유, 평화, 독립을 지원하게 되었다.

1998년 5월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는 티모르의 독립을 촉진했다. 부정부패로 물러난 수하르토를 대신해 하비비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비비는 동티모르를 자치령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 1999년 8월 30일 유엔 감시 아래 찬반투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사주를 받은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정국은 혼미해져 2천여 명의 희생자가 나오게 되었다. 결국 8월 30일의 국민투표는 98.6%의 참여율과 78.5%의 찬성률로 티모르의 독립을 결정했다. 유엔은 독립선거관리 위원장을 맡았던 한국의 손봉숙 박사를 통해 그 해 9월 4일 티모르의 독립을 선포했다. 지난해 8월 30일에는 공정한 다당제 자유선거가 실시돼 88명의 제헌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1999년 이후 유엔은 평화유지군을 티모르에 파견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 유엔의 임무는 올 하반기에 끝난다.

나는 지금까지 동티모르를 10번 이상 방문하면서 독립을 향한 길고 험난한 투쟁을 지켜보았다. 동티모르 문제는 WCC와 CCA(아시아기독교협의회)모임에서도 늘 뜨거운 쟁점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대표단이 퇴장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수하르토 정권이 동티모르에서 저지른 만행을 세계가 규탄할 때 WCC의 총회, 중앙위원회, 실행위원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곤혹스러움은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 통치 시절에 비해 티모르인들의 복지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고 있다” “티모르인 대다수가 행복하다” “게릴라들은 공산주의의 사주를 받는 자들”이라고 변명하곤 했다. 비슷한 광경을 나는 WCC에 근무해온 18년 동안 여러 번 목격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한국 교회, 차우세스쿠 독재 시절의 루마니아 정교회, 지금의 미얀마 교회가 겹쳐 떠오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호르타와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87년의 일로 기억된다. 스위스 제네바의 내 사무실로 강직한 인상의 젊은이가 찾아왔다. 자기는 모국의 독립운동을 해외에서 돕고 있는 사람이라면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외교관 학교에 가고 싶은데 5000달러가 부족하니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가 바로 호세 라모스 호르타였다. 나는 기꺼이 도와주었다. 결국 그는 신생독립국인 모국에서 외무부 장관의 꿈을 이루었다.

경제복원, 국민통합도 시급

독립국가로 힘차게 첫발을 내디디는 티모르인들에게 장밋빛 미래만 펼쳐져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80만 인구의 절반이 문맹자이다.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가 티모르 족의 교육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력통치에만 집착한 결과다. 언어 소통장애도 심하다. 공용어가 4가지나 된다.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나이 많은 층은 포르투갈어를 쓰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로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어는 티모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학생과 사업가들은 영어를 쓴다. 문맹자들과 농민들은 그들의 언어인 테툰어(Tetun)를 쓰고 있다. 같은 민족끼리도 말이 다르니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 소수민족이 오랜 동안 강대국의 식민지로 희생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언어가 장애물이 되어 모국어가 있음에도 통합과 발전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장기간의 교육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국민통합 문제도 중요하다. 88명의 제헌국회의원 중 티모르 독립혁명당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55석을 차지했다. 독립투쟁에 앞장서서 오랜 세월 감옥살이를 하고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나나 구스마오와 혁명당 사이에 서로 양보하고 공유하는 미덕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선 구스마오가 대통령에, 혁명당 지도자인 마리 알카티리가 수상에 취임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존재한다. 망명에서 돌아오는 재외동포들, 아직도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잘 해소하고 포용하여 국가를 재건해야 할 것이다.

피폐되어 있는 경제도 큰 과제다. 동티모르에 갈 때마다 나는 땅의 척박함에 놀라곤 하였다. 산달우드와 커피를 제외하면 보잘것없는 농토가 전부이다. 농업을 위한 인프라도 없다. 인구의 80%가 도시로 몰려와 직업을 찾고 있다. 다행히 인접한 바다에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어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동티모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4달러로 알려져 있다. 유엔은 현재의 6500만 달러인 국가예산이 2004∼2005년에는 1조300만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그 중 2500만 달러는 자체 조달할 수 있으나 나머지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다 외국원조액 중 9200만 달러 정도는 석유와 가스 분야에 외국자본을 유치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나 미지수이다. 올 4월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는 구스마오는 “우리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의 경제원조에 대한 위험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미 갈파한 바 있다. 지난해 7월 오스트레일리아와 동티모르는 앞으로 30년 간 석유와 가스에서 나오는 이익의 90%를 동티모르가 차지하기로 조약을 체결했으나 현재 이것 역시 불투명하게 되어버렸다.

500년이 넘는 식민지의 서러움을 떨쳐버리고 새 출발을 하는 티모르. 아시아에서 제일 작은 나라이지만 빛나는 투쟁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가 이 모든 어려움을 헤치고 당당한 독립국가로 우뚝 서길 바란다.

박경서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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