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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02월
  • 2002.02.01
  • 892

지리산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이유


가까이 갈수록 자꾸 내빼어버리는 산이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내 방과 내 마음속 깊은 고향에 지리산을 옮겨다 모셔놓았다.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취해서 꿈속에서도 눈구덩이에 묻혀 허우적거림이여’ ―이성부 시인의 ‘지리산’에서

내가 지리산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여름이다. 지금보다 10kg이나 가벼운 몸으로 한라산을 8시간 만에 왕복하던 시절, 겁도 없이 지리산 종주에 도전한 일이 있다. 버너와 코펠도 없이 약간의 비상식량만으로 장마비와 싸운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토벌대에 투항하는 빨치산처럼 처량하게 하산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지리산은 나의 ‘불경’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햇볕이 쨍쨍하다가도 내가 성삼재 정류장이나 화엄사 주차장에만 도착하면 억수같이 비를 퍼붓는 것이다. 서울에서 구례로 내려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결단이어서 개구멍을 노려본 적도 있지만, 우리의 공무원들은 여지없이 나의 발목을 잡아챘다. 고생 끝에 천왕봉에 가더라도 일출은 언감생심, 잔뜩 찌푸린 하늘을 원망하며 중산리 기슭에서 막걸리만 들이켜야 했다.

스물일곱 번, 지난 가을 무심코 지리산을 몇 번이나 갔는지 헤아려보니 어느덧 내 나이에 근접했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때, 사람에 대한 실망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한국축구가 개망신을 당하거나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부끄러운’ 지지율을 기록했을 때, 나는 어김없이 짐을 꾸렸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줄창 걸으면서 한숨을 토해내고 나면 일상이 다시 그리워지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계기로 지리산에 대한 나의 애정은 ‘종교’ 수준으로 깊어졌다. 나의 지리산 파트너 유철웅(KBS 광주방송총국 기자)은 술에 취할 때마다 천왕봉에서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이 붉게 타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노동해방가’를 부르던 장면을 떠올린다.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친구 봉준호(영화 <플란다스의 개> 연출)는 1990년 봄, 그러니까 3당합당 직후 안치환의 ‘지리산’을 ‘노가바’해서 ‘민자당’으로 편곡했는데, 나는 지금도 지리산 골짜기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

무엇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가져다준 감동을 빼놓을 수 없다. 손승호가 지리산 유격대의 홍보책으로 선임돼 답사했던 주능선이며, 이현상이 최후의 일전을 불사했던 벽소령 아지트, 하대치가 씨름판에서 아깝게 2등에 그쳤던 피아골…. 조정래 선생이 박태준과 박정희를 운운하고 <한강>에 이르러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 안타깝지만, 마지막 10권을 읽으며 눈물을 쏟던 <태백산맥>의 짜릿함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리산에는 ‘산에 미친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산에서는 만날 수 없는 ‘기인’들이 산다. 나는 산을 조금은 탈 줄 알지만, 지리산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단순히 지리산의 10경을 즐기는 차원이 아니라 고사찰을 찾아다니며 ‘마운틴 오르가즘’을 느끼는 도인과 화엄사에서 천왕봉 코스를 하루 만에 왕복한다는 철인을 만날 때마다 지리산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어느 구름 속에 비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음지도 언젠가는 양지가 된다.’ ‘고개를 앞두고는 짐을 풀지 말라.’ ‘아무리 쉬운 봉우리도 쉽게 머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지리산 자락을 걸으면서 자주 읊조리는 말이다. 누구한테 들은 얘기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지리산을 오르내리면서 입에 붙어버린 후렴구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한때 산악반이었던 아내가 결혼 이후 산을 멀리하는 점이다. 아내의 짐을 받쳐들고 이제 겨우 세 살인 아들녀석의 손을 잡고 지리산에 오를 날이 기다려진다. 호흡이 가빠지기 무섭게 배낭을 챙기는 나에게 “지리산에 애인이라도 숨겨두었느냐”고 투덜거리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육성철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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