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440

‘서민속으로 파고드는 시민운동을’

대학생 야학교사 박문수


“열여섯 살, 정말 비단결처럼 순수한 아이였죠.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낮엔 인쇄소에 다녔어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누워 있어서 자신이 학비를 벌 수밖에 없었어요. 백내장이 좀 있습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욕심은 남달라서 정말 열심이었어요.”

그런 그녀가 어느날부터 야학에 나오지 않았다. 교사였던 박문수 씨(27세)는 걱정 끝에 달랑 공장 주소 하나만 가지고 그녀를 찾아나섰다. 계속되는 철야에 그녀는 많이 초췌해 보였다. 특별히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시간외수당이 주어지는 철야근무는 오히려 그녀 쪽에서 포기할 수 없는 터였다. 물론 야학을 계속 다니고는 싶었지만 자신의 배움에 대한 열정보다 동생의 학비마련이 더 중요했기에 그것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쯤 공장을 찾았지만 그녀는 끝내 야학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야학교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었노라고 말한다.

야학 없는 사회 꿈꾸며

소년소녀 가장들을 비롯해 나이 지긋한 아저씨까지,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는 야학에는 정말 다양한 삶의 궤적들이 새겨져 있다.

“그분들 중 누구 하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대부분 가정적인 이유 때문이죠. 하지만 조금만 관심있게 지켜보면 단순히 가족문제에서 그칠 게 아니었어요.”

가족문제는 곧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되고, 이는 왜곡된 부의 재분배 과정과 얽혀 있다는 게 박문수 씨의 생각이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시작한 야학은 그로 하여금 사회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줬고, 이후 그의 삶 한켠을 차지하게 되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하죠. 사실 야학이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가장 큰 바람이라면 하루 속히 더 이상 야학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야학이 꼭 필요하단다. 때문에 그는 한 명이라도 야학교사를 더 모집하고, 배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나 사회의 변화를 꾀하는 것은 아마 천성인 것 같다며 스스로 멋쩍어했다. 학교, 동아리, 심지어 군에 있을 때에도 조금이나마 그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개선을 위해 애썼다고. 군대 시절에 굳이 간부 후보생에 자원한 것도 이런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며 웃어 보였다. 개인의 노력으로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역부족인 군대에서도 그는 좀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단다.

“멀쩡한 사람들도 군대에 갔다오면 다들 돌이 된다고 하죠. 저는 그게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제 아래에 있는 부대원들만큼은 그렇게 만들기 싫었습니다. 취침시간 이후 내무반에 불을 켜놓으면 안 되지만, 그 시간을 이용해 잠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자신이 어울리는 보직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지옥에 가면 그곳에서 ‘지옥개혁운동’을 하겠다던 박원순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의 말이 떠오른다. 96년 캠퍼스에 붙어있던 참여연대 포스터를 보고 마음이 쏠려 바로 전화를 넣었다는 박문수 씨. 그가 맺은 참여연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정치개혁을 꿈꾸는 청년모임인 ‘참여정치’에서 꾸준히 활동을 했던 그는 지금까지도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만큼 현실정치를 보는 눈도 깨어 있다.

군생활을 할 때에도 BOQ(간부숙소)에 마련된 인터넷을 통해 사이트 찾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참여연대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는 참여연대를 “서민이 가려워하는 곳을 찾아 시원하게 긁어주는 시민단체”라고 표현한다.

야학을 하면서 마주친 부조리는 두눈 뜨고 가만히 볼 수만은 없는 현실이었다. 참여연대는 사회적으로 주요쟁점이 되는 문제점을 찾아 사람들을 속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낙천·낙선운동과 삼성 황태자 이재용 씨에게 증여세를 과징한 부분을 지켜보면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낙천·낙선운동이 위헌으로 판결 났을 때는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올랐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느새 참여연대와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있었다. 그는 참여연대가 좀더 대중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들어 주위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듯 하다며 참여연대의 활동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리고 서민 속으로 파고드는 활동에 주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놓았다. 참여연대의 활동이 서민들과 동떨어진 채 ‘자기만족’에 그치는 것은 금물이라는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그는 전국야학협의회 의장을 맞고 있는 이은주 씨(33세·광주무등야학 교장)를 통해 진정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실감하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야학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1주일에 한두 번은 꼭 학생들이 있는 광주를 찾는단다.

박문수 씨는 그녀를 도와 지금은 전국 야학의 실태를 파악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모 출판사와 함께 전국 야학에 1000만 원 상당의 검정고시 교재를 무료로 공급했다고 한다. 짧지 않은 야학교사 경험을 바탕으로 교사들에게 카운슬러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자신이 일하면서 느꼈던 야학교사의 어려움,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 등을 후배 교사들에게 전하는 것.

그는 이제 대학 3학년이다. 배움이 부족한 이들에게 쏟아온 노력에 비해 자신의 배움은 많이 늦어졌다. 졸업 후 진로를 명확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시간을 내서 야학만큼은 계속하고 싶다고. 그를 만났던 단국대의 야학 동아리방을 나설 때, 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야학의 불빛은 켜져 있을 테고, 교사와 학생들은 학업에 열중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한태욱(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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