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3월 2002-03-01   837

‘우리는 모두 준비된 신용불량자’

작은 권리 찾는 사람들 – 과중채무자모임 이끌고 있는 석승억 대표


그와 만나기로 한 곳은 ‘약속의 집’이었다.

원래 약속은 대개 서로의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리라. 특히 돈을 빌릴 때는 대부분 언제까지 갚겠다는 철석 같은 약속과 확인이 거듭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약속의 집’은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흔히 말하는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는 곳이었다. 은행에서 카드 등으로, 혹은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가 약속한 때에 돈을 갚지 못해 은행연합회 공동전산망 혹은 개인신용정보업자의 명부에 오른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그는 ‘신용불량자’가 아닌 ‘과중채무자’라는 말이 더 맞는 것이라고 바로잡아준다. 당장 돈을 갚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갚을 능력과 의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도 그들에게는 한결같이 ‘양심이 불량한 무능력자’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약속의집에서 만난 석승억 씨(35세)는 그런 ‘과중채무자’였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하고자 시작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사업에 나섰던 석승억 씨는 결국 1000만 원의 개인 빚과 280만 원의 카드 빚을 안은 채 사업을 정리하게 됐고, 그 빚 때문에 2년이 넘게 도망다니다가 석달 넘게 교도소생활까지 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것이 97년. 그러나 ‘신용불량자’가 되고 보니 재기를 위한 취업도, 장사도 쉽지 않았다. 혼자 울화만 삭이고 있던 어느 날 만난 한 목사가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재기의 길을 함께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 날로 인터넷에 동호회(www.freechal.com/blacklist)를 열었다. 그것이 2000년 2월의 일이고, 2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 모여든 과중채무자들이 3600여 명이나 된다. 이곳에 올라온 회원들의 사연을 모아 ‘신용불량공화국’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처음에는 게시판에 올라온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를 나누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으로서 빚 때문에 자살하려는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 만 원의 휴대전화 요금이 밀려 독촉을 받다가 급한 마음에 원조교제에 나선 청소년들이나 ‘신체포기각서’ 등의 극단적인 위협에 쫓겨 장기매매, 성매매, 절도, 사기에까지 나서는 사람들에 대해 여전히 ‘개인 책임’이라며 뒷짐지고 선 이 사회가 차츰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섰거나 가족을 위해 대출을 했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갚지 못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돼 피폐해지는 이들의 모습이 가슴아팠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담보나 연대보증이 있는 경우를 빼고는 제도권 금융을 전혀 이용할 수 없어 급한 마음에 이자가 몇 백 %나 되는 사채를 쓰게 되는데 대부분의 월급생활자들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결국 급여가 압류되거나 빚 갚으라는 독촉 전화에 시달리다 보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재취업도 쉽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무능한 아버지, 골칫덩어리 자식, 부담스러운 친구로 사회에서 서서히 고립되고 마는데 그런 사람들이 결국 잠재적인 사회불안세력이 되는 것 아닙니까.”

노숙자가 된 다음에 지원하기보다 노숙자가 되지 않도록 돕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이하 신구연·credit815.org)라는 시민단체를 설립하는 데 앞장선 이유도 바로 그러한 문제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을 좀더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 그는 경희대 NGO대학원 지도자과정까지 마쳤다.

채무자와 채권자 상생 방안 찾아야

신구연은 먼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지 않도록 연대보증이나 어음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소득 없는 학생에 대한 신용카드 남발을 막고, 미성년자의 휴대전화 가입시 부모의 지불각서를 첨부하도록 하는 방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참여연대, 민주노동당 등과 함께 이자제한법 부활을 촉구하는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이미 과중한 빚을 짊어진 사람이라면 일정한 계획을 세워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도록 상담을 해주고 있다.

“가령 1억 원의 빚을 지게 된 사람에게 가게가 딸린 4000만 원짜리 전셋집이 있다면 무조건 집과 가게를 내놓아 빚을 갚으라는 종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빚을 계속 갚아나갈 기본적인 자산이 없어져 더 어려운 상황이 되기 십상이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채권추심은 너무 극단적이에요. 채무자나 채권자 모두를 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이제는 찾아야 합니다.”

채무자의 편에 서서 취업기회를 만들어주고 변제계획을 함께 세운 후 계획 이행에 대한 감시 등의 방법으로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갈등을 예방하는 미국의 CCCS라는 비영리단체가 바로 그 좋은 예다. 더욱이 이 단체는 기업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기업들이 CCCS를 통해 변제를 유도하는 것이 채무자를 직접 압박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1000만 원의 빚이 남아 있지만 그는 빚을 갚는 일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일을 먼저 하기로 했다. 그의 선택을 선뜻 이해하지 못할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때 스스로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가 남에게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새삼스레 깨달으며 느꼈을 기쁨을 알 것 같았다.

평생 과중채무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는 그의 눈에는 이제 국내 경제상황이나 소비경향, 카드사들의 동향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지난해 신용카드 사용실적은 445조원으로 98년의 7배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외국에서 신용카드는 할부나 일시불 구매에 주로 쓰이는 데 반해 우리는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비중이 카드사 매출의 65%(2001년 현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들도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폭넓게 사용하면서 요금연체가 빈발하고 있다. 이러한 탓에 “신용불량자의 수는 공식집계된 것만 300만 명 가량이지만 실제 수는 그 곱절”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특히 월드컵과 선거가 있는 올해엔 돈이 많이 풀리면서 소비심리가 자극돼 과중채무자들이 양산될 수 있다고 그는 걱정했다.

어쨌든,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개설한 사이트에 모여들고 있다. 단순 상담만이 아니라 쇼핑몰 운영 등으로 일자리를 마련해 과중채무자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다시 설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 갖가지 아이디어가 그에게 넘쳐난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돈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당장 한 푼이 아쉬운 회원들이 대부분이라 약속의 집도 자신이 어렵게 마련했고, 몇몇 사람들이 쥐어주는 후원금으로 가까스로 운영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약속의 집에 들어오는 조건인 ‘재기 약속’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그는 버티고 있다.

한혜영 본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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