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3월 2002-03-01   1011

부끄러움을 주는 남자 홍세화

부끄러움을 주는 남자 홍세화


5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그는 순수한 사내다. 그 순수 앞에서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부끄러움을 잊어버린 사회에서 부끄러움과의 만남은 아주 귀하다. 그래서 즐거운 만남이다. 모두들 귀성길에 오르던 지난 2월9일 토요일. 그를 만났다.

30년 만의 차례

설은 혼자 지내시나요?

“딸은 어머니 위로해 주러 프랑스로 갔고.”

외로우시겠어요.

“그렇지는 않아요. 부모님이 다 서울에 있어요. 근 30년 만에 차례도 지내야 하고…. 맞아요. 30년 됐을 거예요.”

30년 만의 차례. 그렇다. 그는 23년 동안 돌아올 수 없었다. 그 앞의 불효까지 치면 30년의 불효인 셈이다. 그는 지금 딸과 함께 서울에 산다. 딸은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 논문을 쓰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66년에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가 1년 만에 때려치우고 69년에 다시 외교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래도 어색하다. 바꿔 갔다는 외교학과도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차라리 시적이다.

“공대를 간 건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했으니까. 그 때는 으레 수학을 더 잘 하면 공대, 영어를 더 잘 하면 법대나 상대지. 외교학과에 간 건 세계 속의 한반도가 도대체 어떤 운명인지 알고 싶었서였어요. 결과적으로 그것도 잘못한 거였네요.”

방황을 오래 하셨네요.

“(웃으면서) 인생이 다 방황이죠.”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대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민주당의 50대 대선주자들과 그는 비슷한 나이다. 요즘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어 보았다.

“뭐가 어때?(웃음) 노무현 씨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는 아직 당원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있다. 『진보정치』에도 자주 글을 올리는 그가 노무현씨를 지지하는 이유는 뭘까? 당내에서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발언 아닌가?

“유연성이 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민주노동당이 이회창씨보다 민주당 후보를 더 비판하는 것은 균형감각에 맞지 않는 것 아니에요?”

민주노동당 쪽에서는 표만 놓고 따진다면 분명히 노무현을 기피할 이유가 있다.

“당원이 되면 혹시 달라질지 모르죠. 프랑스처럼 2차 투표가 있으면 그런 어려움은 없어질 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기 힘들죠. 그래도 ‘신비판적 지지론’ 같이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는 건 좋지 않다고 봐요. 내용이 중요한 건데 ‘너는 개량주의’ 이런 식으로 딱지를 붙이는 건 좋지 않아요.

사회 진보의 관점에서 대중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항상 긴장하는

자세가 필요한 거죠 그런 고민 없이 규정부터 하는 것, 거기서는 좀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대중은 한번 획득한 것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획득한 것은 김대중이라는 층계를 올라선 결과예요. 만일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씨가 당선되면 두 계단 올라서는 일이 될 겁니다. 진보는 느린 걸음이에요.”

그가 노무현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것은 긴 사유의 결과였던 것이다. 진보는 느린 걸음이다

“그 말은 귄터 그라스가 피에르 부르디외와 대담하면서 한 얘기예요. 제가 거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영국, 독일, 프랑스가 어떻게 대응했느냐였어요. 블레어는 신자유주의에 더 가깝고 슈뢰더는 중간쯤, 죠스팽이 제일 나은 게 개인의 차이 때문일까라는 의문이죠. 결론은 각 사회구성원의 정치사회 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이 그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프랑스의 높은 사회의식이 죠스팽을 만들었다는 얘기죠.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곧 진보이므로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일 거예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래서 진보는 느린 걸음인 거죠.”

대중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에 걸맞은, 그런 사고를 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프랑스에서는 언론이나 교육이 그런 사고를 하는 데서 순작용을 하죠. 예컨대 중학교 교사의 80%가 진보적이죠. 그 쪽에서 얘기하는 좌파예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노골적으로 계급문제에 관한 얘기를 합니다. 아들녀석을 보니까 중학교 3학년 때 에밀 졸라의 『제르미나』를 읽고 독후감을 쓰고 토론을 해요. 고등학생이 되니까 솔제니친 망명의 성격에 관해 토론을 해요. 솔제니친 스스로는 보수적인 사람이잖아요? 또 우리는 중고등학교에서 현대사를 거의 배우지 않죠. 프랑스에서는 1학년 때는 프랑스 대혁명까지 배우고 2학년이 되면 1939년까지, 3학년은 2차대전 이후를 배워요. 현대사의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죠. 이것은 고등학교 때 이미 계층·계급적 사고를 적지 않게 가지게 된다는 거예요. 예컨대 고등학교 졸업 철학 시험 중 인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출제된 문제가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한다”는 주제에 관해 논하는 것이었어요. 국가론인 거죠.”

프랑스의 졸업시험이 그렇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곧 국민의 사고를 형성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우리의 교육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또 하나 얘기를 한다면 공화주의에 관한 거예요. 공화주의에 관해 조금만 토론이 되어 있어도 색깔론이라든가 지역주의는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의 헌법 1조에 보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규정돼 있는데 정작 우리는 공화주의가 뭔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러나 차곡차곡 쌓이는 것 없이 서방의 사상이나 제도를 가져온다고 해서 곧바로 우리가 그 수준이 되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사상누각이 될 수 있죠. 대중들이 사회경제적 처지에 맞는 정치사회 의식을 전혀 갖지 못한 상황…, 1300만, 1400만 노동자 중에서 노동자 의식을 가진 사람이 몇 십만 명이나 될까.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을 통해 그 사람들이 스스로 노동자 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중간 과정을 마련하는 게 필요한 거죠.”

지역주의, 그리고 연대의 조건

정치에서는 지역주의가 공공성 파괴의 주범인 것 같은데요.

“『아웃사이더』에 썼는데 이문열씨가 ‘이문열책반환운동’을 펼친 화덕헌 씨를 찾아가서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했다는 얘길 썼는데요. 사실 사람이 나고 자란 지역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이를테면 누울 자리는 선택할 수 있어도 태어난 곳은 선택할 수 없잖아요.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시비 거는 것. 지역주의는 한국의 이성이 얼마나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느냐를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국민작가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고 그것이 허용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수준이 낮다는 얘기죠.”

그럼 어떻게 해야 지역주의가 극복될 수 있을까요?

“우선 저는 지역주의 문제를 보고 제 나름대로 참 많이 반성했어요. 무엇보다 이문열 씨가 했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보고 굉장히 충격 받았습니다. 이런 지경까지 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너 경상도 사람이지?’라고 하는 말과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입니다. 둘이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회주의예요. 이런 기회주의와 싸워야 해요.”

우리 사회는 프라이버시도 침해하지만 퍼블릭, 공공성 역시 공격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주의만 남은 게 아닌가 싶은데요.

“프랑스인들은 교육과 의료의 공공성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공교육 같은 것을 잘못 건드리면 큰일나요. 지난번에 사회당의 알레그레 장관이 대학에 경쟁을 조금 도입하려고 했다가 쫓겨났어요. 변화를 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죠. 그런데 우리는 사적인 것도 침해하고 공적인 것은 아예 인정을 하지 않고 힘 가진 놈이 다 가지려 하잖아요.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연대가 나올 수 없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역사가 그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신구교가 처참하게 싸웠을 때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앵똘레랑스한 행위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똘레랑스가 시작되고 그것이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로 이어지면서 인문주의가 확립되고 18세기에 계몽철학을 거쳐 공화주의로 넘어갔는데요. 우리는 이런 과정 중에서 단 하나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남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연대라는 건 어렵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에 공공성의 전통이 없었던 건 아닐 텐데요.

“박정희시대에 경제주의로 과거의 공동체주의를 깨뜨렸기 때문에 한국은 이미 신자유주의를 두 팔 벌려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었어요. 이기주의만 남은 거예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프랑스는 철저하게 개인주의 사회지만 세 살 때부터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교육비가 전혀 들지 않아요. 프랑스 국민의 65%는 자신의 돈을 떼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동의합니다. 이건 사회주의나 좌파 얘기가 아니에요. 공화주의와 관련 있는 얘기죠. 요즘 젊은이들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편하게 사는 것과 올바로 사는 건 다른 건데 편하게 사는 것만 생각합니다. 『한겨레』만 봐도 『이코노미21』에 따라 붙은 게 『싱크 머니』예요.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한겨레』도 먹고살아야겠지만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얘기하다 보니 너무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또 혹시 독자들은 인터뷰를 보면서 프랑스와의 비교 때문에 공연히 반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희망을 얘기해야겠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사회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데서 오히려 희망이 생깁니다. 너무 많이 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데서 자성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운동의 상황

그렇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우리 시민사회운동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1901년 프랑스에서 시민단체법이 나왔을 때의 상황이 지금의 한국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어요. 드레퓌스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부권력, 정치권력, 거대 신문들, 가톨릭 교회까지 드레퓌스 반대파를 형성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지식인이라는 말이 생기면서 여기에 저항합니다. 이 과정에서 3년 만에 시민단체법이 생기거든요. 결국 거대 권력에 저항한 것은 시민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많은 면에서 유사한 점이 발견됩니다. 우리 시민운동의 경우에는 저항하면서 형성되는 면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고요. 민중운동이라고 불렸던 쪽에서 일부러 시민운동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결국 같이 가야겠죠. 이미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또 노동운동은 노동자 내의 차별과 먼저 싸워야 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위해 먼저 싸우지 않고 기업·정부와 싸우려는 모습도 분명히 보입니다. 물론 구조조정이라는 상황이라 어렵겠지만 같이 싸우지 않는 한 사회정의를 얘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대기업 노동자들이 용인하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언제나 그런 사회가 올까라는 질문에 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다만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인가가 과제겠죠.”

그가 『한겨레』에서 할 일도 바로 그 ‘시간 줄이기’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물론 말, 토론이다.

고등학생도 참여하는 토론면 만들 것

“이제 일주일 출근했는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고 처음으로 토론공간을 만드는 데 이걸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제 소임은 일주일에 두 번, 토론하는 면을 맡아 진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밀고 들어간 거예요.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담기는 토론의 장을 『한겨레』에 만드는 것이 제 희망입니다. 앞으로 신문들이 사실보도라는 기본적인 사명에 충실하게 된다면 신문의 차별성은 사설과 토론란에서 나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본격적인 토론란이 없습니다. 시민사회가 모두 참여하는 토론의 장, 글만 잘 쓰면 고등학생도 참여할 수 있는 장입니다. 지식인들이 읽고 참여하는 신문을 만들고 고등학생들의 논설에도 도움이 되는 토론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토론란이 글쓰기 훈련의 장도 돼야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개인적으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질문을 던져봤다. 외국에 살면서 혹시 허망하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느냐고.

“허망은 아니고 끝도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아직 나에게 순수가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23년을 뛰어넘은 오십 중반의 사내. 그는 아직도 순수하다. 그래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가지 더 물어본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습니까? 친구들은 잘나가는데 나는 뭔가 이런 생각….

“몸도 마음도 불편해야 합니다. 가령 주민등록증에 지문날인하지 않으면 불편하죠? 그걸 견뎌야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난해야 합니다. 패배자의 자기합리화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괘념치 않습니다.”

아∼. 부끄럽다. 그는 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연대, 그 아름다운 진보를 위해서 아무런 사기(邪氣)도 없이 뛰고 있다. 그것이 굉장히 느리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말’을 통해서 바꾸는 지난한 작업도 두렵지 않다. 50중반의 사내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또다시 부끄러워진다.

정태인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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