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3월 2002-03-01   813

부시는 “공공의 적”?

부시는 “공공의 적”?


“공공의 적, 부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의 집회에 등장한 피켓의 문구다. 세계평화와 한반도평화를 위협하고 ‘공공의 안녕’을 해치고 있는 부시는 ‘공공의 적’임에 틀림없다. 올해를 ‘전쟁의 해’로 선포해 덕담이 오가야 할 연초부터 전쟁타령이더니, 드디어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부시의 오만한 발언에 국제사회의 여론은 부정적이고 싸늘하다. 중국과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우방국들조차 비난 일색이다. 지난 2월 4일 끝난 세계사회포럼(WSF)에서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을 비난하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비판의 목소리는 미국 내에서도 높다.

반면 국내의 일부 언론과 야당, 심지어 전문가를 자처하는 ‘비전문가’들은 부시 발언에 장단을 맞추면서 부화뇌동하기에 바쁘다. 전세계의 비난 여론과 심지어 미국 내에서조차 일고 있는 비판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이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시의 발언을 거들고 나선 이 나라 냉전수구세력들의 ‘엽기적인 행동’에 분노하는 소리가 높다. 이들은 한미공조에 문제가 생겼다고 난리다. 미국의 부당한 주장과 정책을 일방적으로 무조건 따라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이들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무지와 악의적 왜곡에 차라리 연민의 정마저 느낀다.

그나마 부시의 ‘막가파 식’ 발언이 한풀 꺾인 것은 분노하는 우리 국민들의 여론 덕이다. 6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의 방한을 반대하고 나섰고, 국민들의 반미감정이 해방 후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부시 행정부는 발언 수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아무리 밉더라도, 이번 사태가 일방적으로 북한의 약속위반과 호전성 때문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더 많은 책임이 미국에 있다.

부시가 강경 발언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엔론 스캔들’로 곤경에 빠져 있는 부시가 국내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고,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또 정권의 장래를 걸고 추진하고 있는 MD(미사일 방어)계획과 최근 480억 달러를 증액한 국방예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 쌓기에 다름 아니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 밖에도 한국정부에 대해 ‘차세대전투기사업(F-X)’에서 미국의 F-15를 구매하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라는 견해가 있다. 미국제 무기 도입을 남북관계 및 북미대화 재개와 연계하려 하고 있다는 것. 이번 부시의 발언은 결국 한국이 F-15기를 구매해 주지 않으면, 남북관계에 훼방을 놓고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할 수 있다는 부시의 경고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전략 및 정책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부시의 발언은 단순히 돌발적이거나 일회성 발언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및 동북아 전략의 일환이라는 해석이다. 한반도에서 냉전이 해체되고 남북관계가 진전된다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미국의 전략 및 정책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냉전 해체와 남북관계 발전은 MD계획과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에도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받을 수 없는 ‘썩은 당근’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장래는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큰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북미대화의 앞길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비록 북미대화가 재개된다 하더라도 북미 간에 현안문제의 타결이 이루어지거나 북미관계가 크게 진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은 북한과 진심으로 대화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6월 6일 부시는 북한과 대화재개를 선언했지만, 미국이 제시한 대화 의제는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다. 미국은 조건 없는 대화를 말하지만, 미국이 제시한 의제 속에는 사실상 많은 전제와 조건이 함축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썩은 당근’을 내밀고 받을 것을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더욱이 부시 발언 이후에는, 미사일 등 무기 수출을 중지하고 북한 군사력을 후방으로 이동시켜야 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고 밝힘으로써, 이전의 조건 없는 대화 주장이 허구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또 94년 ‘제네바합의문’과 99년 ‘베를린합의’, 2000년 10월 ‘북미공동성명’과 미사일문제에 대한 합의 등과 같은 기존의 북미간 협상결과와 합의사항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북미관계가 근본적으로 풀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은 과거 핵에 대한 조기 사찰을 비롯해 ‘제네바합의문’의 보완과 추가협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과거 핵에 대한 조기 사찰 요구는 경수로 핵심부품이 인도되기 직전에 받도록 합의한 ‘제네바합의문’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이밖에도 미국은 ‘제네바합의문’에서 벗어난 두 가지 사항을 북한에 새로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과거 금창리지역과 같이, 영변 이외의 지역에 대한 현장사찰 요구이다. 이처럼 미국이 다른 지역에 대해 계속해서 핵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추가 사찰을 요구한다면,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위기는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 핵에 대한 조기 사찰을 북한이 수용하지 않으면, 북한에 매년 50만 톤씩 제공하던 중유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할 가능성이다. 북한에 대한 중유 제공은 북한의 흑연감속원자로 폐쇄에 따른 전력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제네바합의문’의 약속사항이다. 이렇게 된다면 ‘제네바합의문’은 사실상 파기되고,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가 다시 재현될 것이다.

MD 위해 북한위협론 필요

최대 현안인 미사일문제도 미국은 실제로는 북한과 협상할 생각이 없다. 미사일문제는 2000년 10월 조명록의 방미에 의한 북미회담을 통해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루어진 바 있다. 북한측은 300마일 이상 미사일의 생산, 시험, 배치 금지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부시가 등장하면서 미사일 협상은 난관에 봉착했다. 일체의 경제적 보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물론, 미사일 협상의 이행여부에 대한 검증을 새로운 조건으로 들고 나왔다. 미국은 MD계획의 명분 약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북한미사일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다. 북한은 이른바 ‘불량국가’ 가운데서도 미사일 기술이 가장 앞선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기한 북한의 재래식 군축도 어려운 문제다. 재래식 군축과 전진배치 군사력의 후방 이동은 북한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 까닭이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소리와 똑같다. 북한이 군사력을 전진배치시키고 있는 것은 한미연합군의 공세적 전략에 대한 대응적 측면이 크다. 제공권과 후방지원능력이 절대 열세인 북한으로서는 군사력을 가능한 한 전진배치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미군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군을 한미연합군과 밀착시켜 배치할 필요가 있다.

생물무기에 대한 사찰 요구 역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국제적으로 사찰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사찰을 받으라는 것인지 황당하다. 생물무기에 관한 한 미국은 할말이 없다. 생물무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비축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게다가 기존 생물무기금지협약(BWC)을 강화해 생물무기의 완전한 폐기와 강제사찰을 규정한 강화의정서를 만들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이 미국의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은 이미 1987년 BWC에 가입했다.

따라서 설사 북미대화가 재개된다 하더라도, 미국은 대화채널만 열어놓은 채 협상을 진전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부시의 입장에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은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결코 서두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미국은 ‘변화하지 않는 북한’, ‘깡패국가 북한’, ‘ 테러지원국 북한’, ‘미국의 안보에 위협적인 북한’이 전략상 필요하다.

미국은 한반도의 적당한 긴장을 원한다?

부시의 위협발언과 불투명한 북미관계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어느 정도의 교류협력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 모두 일단 남북대화의 재개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남북관계 진전과 관련해 역시 핵심 변수는 미국이다. 방한 이후 부시가 한국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원론적으로 지지를 표시할 가능성은 있으나, 미국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한반도 평화는 미국에 의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잘나가던 남북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부시 등장 이후이다. 남북관계의 급속한 진전과 남북 간의 화해, 그리고 한반도문제의 남북한 주도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 남북 간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고 한반도에서 ‘적당한 긴장’이 조성되는 되는 것이 미국의 정책적 이해관계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시는 한국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표면적인 지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억제하고, 현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에 제동을 거는 전략으로 나오고 있다. 김대중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미국의 입맛에 맞는 친미사대적이고 냉전수구적인 성격의 차기정권 등장을 기다리는 정책을 쓸 가능성이 있다. 부시는 한국 내에서 일고 있는 반미감정과 미국에 대한 비판적 기류를 억누르면서, 미국의 MD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한미군의 장래와 미국의 무기판매를 확실히 보장해 줄 친미정권이 절실한 형편이다.

부시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적 행동에 반대하는 한국 정부와 한국에 있는 미군과 그 가족들의 존재는 미국으로 하여금 섣불리 군사행동에 나설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올 한국 대선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친미사대정권의 집권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이들에게 유리한 국면과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우리는 ‘북풍’이 아니라 ‘미풍’을 우려해야 할 판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핵미사일 표적 될라…

더욱이 이번 대선에서 친미사대주의정권이 집권하게 된다면, 내년 민족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부시의 강경 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조하여 그나마 견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를 맞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도태무기 전시장이 될 것이며,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쥐고 있던 한반도 문제 해결의 중심 축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더욱이 MD계획에 한국이 참여하고 미국의 계획대로 한국에 MD망 구축을 위한 지상 레이더기지가 설치된다면, 한국의 안보는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다. MD망을 뚫고 미국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부족한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의 취약한 핵 억지력을 보강하기 위해 레이더기지가 설치된 한국을 중거리 핵미사일의 공격 목표로 설정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졸지에 중국과 러시아의 핵미사일 표적이 되고 핵공격 목표가 되어 핵 위협의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동북아정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시 행정부는 새로 발표된 국방정책을 통해, 동북아 중시전략과 중국 견제정책을 공식화한 바 있다. 일본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대한 지원과 괴선박을 구실로 삼아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일본의 군사적 역할 강화와 군사대국화를 거들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이다. 미일동맹을 미영동맹 수준으로까지 격상시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미국의 MD추진과 일본의 군사력 강화가 맞물려 동북아에서 군비경쟁이 가속화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미국에 강력히 항의해야

한편 남북관계가 소강상태에 빠진 데는 한국정부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부시 등장 이후 미국의 눈치만 보면서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끌려다녔다. 게다가 부시의 망언 이후에도 ‘한미동맹관계가 최우선’이니 하면서 여전히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미국 눈치 보기에 바쁘다. 이제 우리 정부도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 미국의 무모한 강경 정책으로 말미암아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고 강력히 항의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잘나가던 남북관계를 지금같이 소강상태에 빠트린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 있다. 미국의 강경책으로 인해 남북관계 발전에 난관이 조성되고,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면, 한국 내의 반미감정은 계속 확산될 것이다. 미국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철기 동국대 교수 · 평화통일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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