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3월 2002-03-01   891

“일망타진” 및 “속전속결”의 생활철학

“일망타진” 및 “속전속결”의 생활철학


우리의 일상용어 가운데 우리 국민 모두의 일반적인 생활정서에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는 어휘가 둘 있다. 그것은 일반 국민뿐 아니라 정계, 재계, 학계, 언론계, 문화계 등 사회의 모든 주요 분야의 생활양식에도 빈틈없이 골고루 적용되는 ‘범민족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그 어휘는 바로 ‘일망타진’과 ‘속전속결’이다.

우리 국민 모두는 것을 속전속결로 일망타진하지 않고서는 직성을 풀지 못하는 존재들인 듯하다.

‘원조 즉석 다이어트 뻥튀기

한번은 아파트 촌 한 모퉁이 양지 바른 곳에 진주한 ‘뻥튀기’ 차를 본 적이 있다. ‘일망타진’과 ‘속전속결’의 생활철학을 예증이라도 하듯이, 이 타이탄 차에 걸린 현수막에는 ‘원조 즉석 다이어트 뻥튀기’라 쓰여 있었다.

이 단순한 구호 한 줄에는 우리 사회의 ‘뻥튀기’ 속성이 냉엄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터무니없는 과장벽과 겉치레 숭상주의가 이처럼 언제나 즉석불고기처럼 순식간에 만들어지곤 하지 않는가.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꾸준히 제일 잘 팔리는 책의 하나는 요리 책인데, 그에 뒤질 세라 그와 더불어 잘 나가는 책이 바로 다이어트 책이다. 허나, 우리의 다이어트 광신주의는 균형 잡힌 정신적 몸매보다는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보이기를 열망하는 우리들의 형식주의적 스타일 단련법의 산물은 아닐는지. 우리는 ‘체력’이 아니라 ‘체형’만을 문제 삼는 듯하다.

그뿐 아니라 조상 잘 찾는 우리는 또 언제나 ‘원조’를 숭상해 마지않는 민족 아닌가. 어찌되었든 ‘원조’란 것을 겉으로 내세워야만 권위가 서는 모양이다. 예컨대, 나란히 붙어 있는 식당들이 ‘진짜 원조 집’, ‘원조 중의 원조’, ‘나도 한때는 원조’ 등등의 간판들을 내걸고 마치 열병식이라도 하듯이 서로 경쟁적으로 도열해 있는 광경이 어찌 낯선 것이기만 하겠는가.

이 단순한 ‘원조 즉석 다이어트 뻥튀기’ 구호가 어쩌면 이리도 우리의 범국민적 ‘일망타진과 속전속결 정신’을 유감 없이 발산하고 있는지.

뷔페 식당과 한국의 정치 세계

우리처럼 식당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쏜살같이 대령하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발광하는 국민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컨대 뷔페 식당은 ‘일망타진’과 ‘속전속결’이라는 우리의 범국민적 근성에 가장 성공적으로 부합한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먹고 싶은 것을 즉각 가져다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꺼번에 온갖 종류의 음식을 송두리째 해치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아닌가. 우리 국민의 생활정서에 그대로 영합하는 이런 유형의 식당이 어찌 성공하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 중에도 이러한 관행에 들어맞는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비빔밥을 일망타진형이라 한다면, 근래에 개발된 컵라면은 속전속결형의 귀여운 사례라 이를 만할 것이다.

우리의 정치 세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특정 계급이나 사회계층에 뿌리를 내린 정당이 없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정당들이 모든 계급과 이해집단을 총망라하여 자기 편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벌부터 지식인, 노동자, 상인, 달동네 주민들까지가 몽땅 그들의 지지기반 및 옹호 세력으로 둔갑한다. 가히 일망타진형이다.

물론, 정당의 존립 기간은 개 한 마리 수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속전속결형’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선거특수용 정당들이 비 온 후의 죽순처럼 솟아나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선거가 국민통합이 아니라 국민분열의 도구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수카르노는 한때 “제3세계의 혁명은 프랑스나 러시아 혁명보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더욱 거대한 혁명이다. 그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정신 혁명을 동시에 포괄하는 종합 혁명이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 적이 있다. 이 절규는 봉건적·신분적 지배에서 벗어날 겨를도 없이 곧장 제국주의적 침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제3세계 모든 신생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운명을 예리하게 증언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지극히 혁명적인 상황인데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기묘한 모순에 신음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일망타진과 속전속결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급진적’ 시민운동을 위하여

제도정치권은 지금껏 ‘초전박살’과 ‘견적필살’의 정신으로 완전 무장하여, 자신의 반민주적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일체의 비판세력을 속전속결로 일망타진하려고 발버둥쳐 온 자랑스러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에 발맞추어 우리의 저항세력 역시 속전속결형 소나기식 운동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사회운동은 폭포처럼 쏟아지다가 이내 그쳐버리는 소나기 같은 성향을 과시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비장하긴 하지만 겉으로만 맴돌며 물 위의 기름처럼 떠다니는 애국지사형 고군분투와 메아리 없는 비명으로 일관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속전속결로 일망타진하려는 영웅적 투지만 돋보였지, 부드럽게 내리지만 온몸을 꾸준히 적시는 보슬비와도 흡사한 대중과의 끈적끈적한 교감을 찾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우리의 사회운동은 무대 위에서 홀로 목청 높여 절규 해 온 감이 적지 않다. 머릿속에서 끙끙대며 끄집어내는 일회용 수학공식 같은 것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에서 대양의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공감의 물결로 솟구치는 끈질긴 대중운동, 절창이 아니라 합창, 비명이 아니라 함성, 한 사람이 천 걸음을 내닫는 것이 아니라 천 사람이 한 걸음을 함께 내딛는 결속과 단합의 꿋꿋한 유장함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중과 같이 호흡하고 신음하고 열광하면서 파문처럼 끈질기게 번져 가는 사회변혁의 도도한 흐름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본래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래디컬한’ 민족이다.

오늘날 이른바 ‘좌파’의 자세를 아우르며 급진적이거나 과격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 ‘래디컬’(radical)의 어원은 ‘뿌리째 파고든다’는 의미를 가진 ‘라딕스’라는 라틴어다. 말하자면 뿌리까지 파고들어 속속들이 따지고 드는 결연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게도 옛적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정신이 전통처럼 살아 숨쉰다. 요컨대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태도야말로 우리의 고고한 자랑거리 아니었던가.

헌데 간절하면서도 불가능해만 보이는 우리의 혁명을 대신할 급진적 사회개혁의 원동력으로 이 일망타진과 속전속결 정신을 활용할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회적 모순과 비리를 속전속결로 일망타진할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얼마나 밝게 빛날 것인가.

박호성 본지 편집인 ·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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