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2월 2002-02-01   1017

갈등해결 · 예방의 키워드는 “참여”

갈등해결 · 예방의 키워드는 “참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갈등 분쟁을 처리하는 방법은 딱 세 가지다. 첫째, 힘 또는 폭력으로 분쟁을 끝내려 하는 것.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서 보듯이 예나 지금이나 널리 쉽게 쓰이는 방법이 이것이다. 두 번째는 법률 관습 권위 등 제도화된 틀 안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것. 재판은 가장 대표적인 분쟁처리제도다. 하지만, 문제가 많다. 우선 시간과 돈이 엄청나게 든다. 판사의 판결로는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판결 결과 승자는 좋아하겠지만 패자는 대개 억울해하며 승복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대사회에는 기존의 법률조문과 판사의 판단력에만 맡기기엔 너무나 복잡한 사건들이 많다. 뭔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세번째, 분쟁 당사자들이 대화를 통해 직접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이다. 협상 중재(Mediation) 등 다양한 분쟁해결절차가 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갈등이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갈등해결과정이 재판과 가장 다른 점은 분쟁의 당사자가 문제해결의 주체로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던가. 모순을 가진 사람만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어떤 갈등이든 그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자신이 원하는 해결책을 가장 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 갈등의 당사자들이다. 그 과정에서 속담대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고”, 진정한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 해결책 역시 누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여해 직접 만들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애착이나 만족도도 높고, 합의사항도 더 잘 이행하게 된다.

갈등분쟁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당사자들이 해결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해결의 기본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 사회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일례로, 무슨 분쟁이나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정부나 사회단체에서 흔히 애용하는 것이 공청회나 토론회다. 그러나, 실제 어떤가? 대개 전문가들만이 마이크를 잡고 찬반 양론의 평행선을 달릴 뿐, 문제해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해결과정에서 배제된 지역주민 등 당사자들의 반발만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쟁이 생겼을 때 흔히 당사자들은 싹 빼놓은 채 교수 등 일부 전문가들만으로 ‘000위원회’나 ‘000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 실례가 지난해 말썽 많았던 새만금분쟁이다. 환경 및 개발 전문가들이 모여 조사하고 모종의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취했으나 문제 해결에는 다가서지 못했다. 학자들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대목도 있지만 그건 곁가지일 뿐이다. 문제해결과정의 기본줄기가 돼야 했던 것은 문제의 당사자(중앙 및 지방정부·지역주민·환경단체 등) 대표들이 함께 모여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참여민주주의를 통한 분쟁예방

‘치료보다 예방’(Prevention is better than cure)이란 의료계 격언은 사회갈등에도 꼭 들어맞는다. 의견이나 가치관의 차이나 이해관계 충돌로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으로 커져 격화되면 해결이 아주 힘들어진다. 개인과 사회가 보는 피해도 엄청나다. 따라서, 할 수만 있다면 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것이 최선이다. 분쟁예방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공공분쟁을 예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필수적인 장치가 바로 참여민주주의다.

기존의 행정은 계획수립에서부터 사업추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의사결정을 정부기관 안에서만 처리해왔다. 그러다 보니 그 결정이 외부에 알려진 순간부터 분쟁이 촉발돼왔다. DAD(Decide-Announce-Defense)문화, 이른바 ‘밀실’ ‘탁상’ ‘졸속’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공공분쟁의 주범인 셈이다.

이와는 달리, 참여민주주의의 패러다임은 시민을 행정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바꿔주는 것이다. 각종 규제나 개발사업 등 중요한 행정행위로 직접 영향을 받는(이해관계가 좌우되는) 시민 또는 업계가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해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결과를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분쟁의 불씨가 사전에 제거됨으로써 분쟁이 예방된다. 함께 참여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시민 및 업계가 그 결정을 자발적으로 지키게 돼 행정효율도 높아진다.

실례로,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중 하나인 님비(Not In My Back Yard)문제를 살펴보자. 쓰레기매립장이나 소각장 등 혐오·기피시설을 지으려면 어김없이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돼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서울 서초구 화장장 분쟁도 그런 사례다. 정부와 언론은 항의하는 주민들을 ‘집단이기주의’라 공격하지만, 사실 그건 잘못된 지적이다. 매립장이나 소각장 등 혐오·위해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와 먹는 물과 공기를 더럽히고 악취를 풍기고 땅값을 떨어지게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님비분쟁은 환경 문제나 집값 때문에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다.

나는 2년 전 국내 쓰레기매립장 분쟁 실태를 연구 조사한 적이 있다. 그때 전국의 분쟁지역 주민들을 만나본 결과, 그들이 반대운동에 나선 근본적인 이유는 환경위험이나 보상금 같은 현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보다 깊숙한 인간적인 문제, 자존심 문제, 그리고 공정성의 문제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주민들이 한결같이 분개하는 것은, 관청이 사전에 주민들과 한 마디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매립장 부지를 선정, 통보했다는 점이었다. “우리들을 얕보고 무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것이었다. 매립장이 어딘가에 들어서야 한다는 건 주민들도 잘 안다. 그런데도 반발하는 것은, “다른 후보지도 많은데 왜 하필 우리 마을이냐”며 입지선정과정의 공정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님비분쟁을 예방하려면, 다시 말해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혐오·기피시설을 지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관측에서 일방적으로 입지를 결정하지 말고 주민 대표들이 입지선정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선정기준이나 절차도 공개적이고 객관적이게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최종 입지로 선정된 지역 주민들도 큰 반발 없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들의 대표가 참여해서 공정하고 공개적인 절차로 선정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남 장흥군에서는 지난 98년 이런 방식으로 쓰레기매립장 부지를 선정했다. 그러자, 해당 주민들에 대한 보상금과 지원사업 금액은 다른 지역보다 아주 적었는데도 주민들은 거의 반발하지 않았다. 주민참여방식으로 분쟁예방에 성공한 소중한 사례다.

서초구 화장장분쟁도 같은 맥락에서 해결책을 볼 수 있다. 서울시는 추모공원 부지선정과정에 시민단체 대표들을 참석시키는 등 이전보다 진일보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각 구청이나 대상후보지 지역주민들은 그 과정에서 배제됐다. 각 구청과 1차 후보지로 뽑힌 지역의 주민대표들이 직접 참여해 최종 부지를 선정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지금과 같은 반발을 미연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이곳 미국의 분쟁해결전문가들 중에는 님비(NIMBY)를 NIMBI(Now I Must Become Involved: “이제 나도 참여해야겠다”)로 바꿔부르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님비문제의 핵심을 짚은 좋은 표현이다.

비단 님비분쟁만이 아니다. 정부·기업·학교·사회단체 등 우리 사회 곳곳의 갈등분쟁중 대부분은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의사(정책) 결정구조 때문에 빚어진다. 김대중정부의 의욕적인 개혁이 번번이 반발에 부딪쳐 좌절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고방식부터가 문제다. 개혁조치로 영향을 받는 쪽과 나아가 ‘개혁대상자’까지도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켜 “함께 개혁해가자”는 식으로 추진했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참여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갈수록 절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강영진 미국 전문중재인·조지메이슨대학 분쟁해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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