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6월 2001-06-01   856

숲 속의 도시를 꿈꾸며

가로수

황홀한 신록의 시간은 어느덧 지나가고 나무들은 짙은 초록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람결에 따라 일렁이는 짙은 초록의 물결은 얼마나 상쾌한가? 저 물결 속으로 들어가 나도 맑고 상쾌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신록의 계절이 다 가고 짙은 초록의 계절이 오도록 새 잎을 옳게 틔우지 못하고 황량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서울의 겨울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가득 차 있고, 또 그 사이엔 매연을 내뿜는 차량들이 가득 차 있다. 한숨 돌릴 수 있는 빈 곳이라곤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이 도시는 그 자체로 사람들을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내몰기 위한 거대한 기계와도 같다. 그러나 또 다시 봄이 찾아오면 이 기계에도 생명의 화기가 돌기 시작한다. 거리 곳곳에 심어 놓은 가로수들이 새 잎을 틔우기 때문이다. 연약하지만 세상을 밀고 나가는 힘을 새 잎은 가지고 있다. 서울이라는 기계에 생명의 화기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그 힘이다.

이 도시에서 우리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즐겁고 아름답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이 부드럽지만 끈기 있는 힘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서울에서 제대로 자란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서울의 안과 밖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조상의 음덕’으로 물려받은 고궁들, 그리고 냉전의 산물인 군사시설들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 도시를 인간답게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녹지공간은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이 도시가 생명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이러한 녹지공간을 시내 곳곳에 조성해야 한다. 당연히 그것은 엄청난 지가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의 곳곳에 심어 놓은 가로수의 중요성은 더욱더 두드러진다. 자연을 파괴하고 건설된 근대 도시에서 가로수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다. 서울처럼 파괴가 심한 곳에서는 더군다나 그 중요성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가로수를 너무나 우습게 대하고 심지어 가혹하게 학대하고 있다.

도시 속에서 자연을 지키는 의미

가로수가 도시에서 하는 구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야후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가로수는 다음과 같은 여섯가지 구실을 한다고 한다.

“가로수의 기능은 여섯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보행자나 운전자, 그리고 기타 사람들에게 쾌적한 느낌과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태양열을 흡수하고, 눈·비·안개 등을 차단하거나 감소시키고, 바람의 영향을 완화시켜 미세기후(微細氣候) 조절효과를 제공한다. 수관의 가지와 잎이 먼지와 분진 등을 흡착하고 유해가스를 흡수하여 공기를 정화한다. 조형물체로서 아름다운 선형미(線形美)를 지니고, 수벽(樹壁)과 배경용으로 사용하여 장식효과를 지니며, 도시 건축물의 육중한 느낌을 부드럽게 한다. 건축효과로서 생활공간을 주위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분리시켜 사생활을 보호하고, 가로수를 이용하여 공간을 효율적으로 분할, 이용할 수 있다. 공학적 효과로서 토양안정화에 따른 침식을 방지하고, 소음을 차단하여 방음효과를 주며, 방화대(防火帶)의 기능도 갖는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구실은 사실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도시의 곳곳에서 자연을 살려내는 것, 그렇게 해서 도시의 곳곳으로 자연을 들여오는 것이다. 거리는 도시의 동맥이다. 가로수는 그 동맥에 자연의 숨결을 불어넣음으로써 도시 전체가 생동감과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 아니, 살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삶은 자연 속의 존재로서 인간을 부정한 삶,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파괴한 삶일 것이다. 이것은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파괴적 개발’이 우리에게 강요한 삶이었다. 우리가 진정 그러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 도시에서 자연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연적 감성으로 충만한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숲 속의 도시’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가로수가 자연 그대로 잘 자라도록 하는 것으로 이 목표에 성큼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서울에는 이미 많은 가로수들이 있다. 가로수가 없는 거리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지방 도시들의 경우도 비슷한 것 같다. 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도 곁에도 가로수들은 어디에나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곳에서 자연 그대로 잘 자라 아름다운 자태를 즐길 수 있는 가로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전국의 곳곳에서 가로수들은 학대받고, 학살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적 조형물로 자라야 할 가로수들이 이런저런 이유들로 행해지는 ‘마구잡이식 가지치기’로 말미암아 흉칙한 몰골로 비참하게 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국의 곳곳에서 가로수들은 박정희의 ‘파괴적 개발’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가로수들은 자연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흉악한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던들 아름답게 자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여러 가지 구실을 하고 있을 가로수들이 오히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흉칙한 몰골이 되어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크게 자란 나무들은 가로등이나 신호등의 불빛을 막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마구잡이식 가지치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불빛을 막는 부분의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지들을 잘라 버리거나 아예 줄기들을 잘라 버리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가로수의 중요성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흔한 이유는 ‘전선 보호’인 것으로 보인다. 나무가 자라면서 전선을 끊어 버리는 것도 아닐텐데, 여하튼 이 이유로 많은 가로수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나무가 자라기를 멈추는 겨울을 빼고 곳곳에서 나무들은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수시로 숭덩숭덩 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구잡이식 가지치기’는 가로수들이 전봇대 곁에서 전봇대와 비슷한 모습으로 서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물론 가로수는 전봇대와 다르다. 그 본성대로 아름답게 자랄 수 없게 된 가로수들은 줄기와 가지 끝이 뭉개진 기괴한 모습이 되고 만다. 가로수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없어진 줄기와 가지를 대신해서 몸통에서 새 잎을 틔운다. 그 안쓰럽고 두려운 모습을 보신 적이 없는가?

플라타너스가 문제인가, 우리가 문제인가

‘전선 보호’를 이유로 가로수에 대해 자행되는 학대에서도 하부구조가 부실한 이 사회의 특징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차치하고라도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도 튼튼한 하부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상·하수도, 가스, 기름, 전기 등이 모두 깨끗하게 도시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깨끗하게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도시들은 이 모든 것이 모두 불량하게 설비되고 운영되고 있다. 건물들이 가득 차고 불빛들이 휘황찬란하지만, 서울은 하부구조가 대단히 부실한 위태로운 도시이다. 제대로 된 도시라면, 전선은 땅 속으로 들어가고 가로수는 본성대로 아름답게 자라야 한다.

서울로 몰려드는 거대한 송전탑들과 어지럽게 뒤엉킨 전선이 이 도시를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이런 상태로는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는커녕 살만한 도시가 될 수도 없다. 전봇대가 없어서 가로수가 제대로 자란 아름다운 거리의 모습과 그렇지 않은 곳의 어지럽기 짝이 없는 심란한 모습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전선을 땅에 묻는 것은 이 사회의 부실한 하부구조를 바로잡는 것이고, 이 땅을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조국’으로 만드는 일이다. 한전이 매년 벌어들이는 막대한 이윤은 이런 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가로수들에 대한 학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먼저 아예 몸통이나 큰 줄기들을 잘라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요컨대 ‘참수형’에 해당한다. 이렇게 하면 가로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통나무가 되어 서 있게 된다. 다음에 예컨대 전선에 이르지 못하도록 나무의 윗부분을 잘라내 버리는 것이다. 공평동의 맥도널드 매장 앞에 있는 은행나무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잔가지들만 치되 잎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무들은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가로수들이 이런 식의 학대를 당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당하고 있는 것은 플라타너스이다. 물론 아카시나무나 버드나무도 집중적으로 학대받고 있지만, 플라타너스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나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야후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1993년 현재 서울의 가로수 분포는 플라타너스가 11만8000그루(48%), 은행나무가 9만7000그루(40%)였다. 전국적으로도 이 두 나무가 가로수로 가장 애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만큼 가로수에 대해 ‘마구잡이식 가지치기’가 행해지는 한, 이 두 나무가 가장 흔하게 학대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말로는 버즘나무라고 불리는 플라타너스는 잎이 넓은 활엽수이다. 척박한 환경에도 굽히지 않고 잘 자라며, 큰 잎을 무수히 많이 달고 있어서 정화능력이 탁월하고, 우람하게 자란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바로 이 때문에 플라타너스는 이 나라의 대표적인 가로수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플라타너스는 가장 심하게 학대받는 가로수가 되었다. ‘마구잡이식 가지치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수한 잎을 달고 우람하게 자라는 플라타너스처럼 성가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털을 이용해 씨를 퍼트리는 플라타너스의 특성이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이 털이 기관지 계통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플라타너스를 심하게 학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차라리 플라타너스를 모두 없애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지난 4월 중순에 공릉동의 산업대에서는 학교 내의 플라타너스들을 마구잡이로 잘라내는 일이 일어났다. 산업대에 들어서면 정문 왼쪽으로 아름다운 보도가 있었다. 이 길은 원래 2차선 찻길이었으나, 차량을 본관 오른쪽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보도로 만들었다. 이 길이 아름다웠던 까닭은 길 양쪽에 60년이나 된 우람한 플라타너스들이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기분은 참으로 상쾌했다. 그런데 50그루가 넘는 그 나무들을 어느 날 갑자기 ‘참수형’에 처해버린 것이다. ‘참수형’을 당한 플라타너스들은 한결같이 기괴한 모습의 살아 있는 통나무가 되었다. 이제 그 나뭇길은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황량하고 살벌한 길이 되어 버렸다. 그 나뭇길의 플라타너스뿐만 아니라 산업대의 거의 모든 플라타너스들이 이러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태풍에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했다는데, 정말 그렇다면 길가의 큰 나무는 모조리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가지치기, 발상의 전환 필요

청주에는 플라타너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거리가 있다. 청주 톨게이트를 지나 청주로 들어가게 되면 우람하고 아름답게 자란 플라타너스들이 우리를 반긴다. 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거리가 서울에도 있다. 화랑로의 공릉동 구간에서 시작되어 태능로로 이어지는 길이 그 거리이다. 이곳에 가면 플라타너스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인지, 잘 자란 플라타너스가 도시의 시끄럽고 삭막한 거리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지하철 6호선 공릉역이나 7호선 태능입구역에서 내리시라. 아니면 공릉동이나 태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북부지원 앞에서 내리시라. 그곳에서부터 태능으로 천천히 걸어가시라. 플라타너스가 이룬 숲의 거리를 걸으시며 부디 ‘숲 속의 도시’를 꿈꾸어 보시라. 서울의 모든 곳이, 아니 전국의 모든 도시가 이렇게 바뀔 수 있으며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시리라.

이 아름다운 길이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1970년대 말에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열게 되면서 외국인에게 살 만한 서울을 과시할 목적으로 이 길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이 부근에도 거센 개발의 바람이 몰아쳤다. ‘파괴적 개발’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숲 속의 도시’를 꿈꿀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아마도 문화재보호지역, 군사보호지역, 그린벨트가 겹겹으로 이 지역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숲 속의 도시’란 이런 보호장치들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이런 길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데서부터 빚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서울을 이런 도시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씨를 퍼트리기 위해 털을 이용하지 않는 은행나무도 ‘마구잡이식 가지치기’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플라타너스에 대한 박해는 플라타너스가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짜 문제는 가로수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마구잡이식 가지치기’일 것이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선 보호’이다. 그러므로 가로수를 제대로 길러서 서울을 ‘숲 속의 도시’로 만들려면, 우선 전봇대를 뽑고 땅 위에 더 이상 보호할 전선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 작업만으로도 서울의 경관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정돈될 것이다.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뒤엉킨 전선이 모두 사라진 서울의 거리,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로수를 제대로 기른다면, 서울의 거리는 우람하게 자란 가로수의 띠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잘 자란 아름다운 가로수는 서울의 곳곳에서 ‘숲 속의 도시’를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숲 속의 도시’는 멀리 있지 않다.

이 아름다운 일을 이루기 위해 플라타너스는 더 할 수 없이 훌륭한 나무이다. 시인 김현승이 반세기 전에 읊었듯이 플라타너스는 우리의 훌륭한 친구다. 이런 친구를 학대하고 우리가 어떻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현승, ‘플라타나스’, 1953년)

홍성태 상지대 교수 ·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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