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6월 2001-06-01   760

친구, 퇴영적 패거리주의의 예찬

영화 <친구>를 봤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시중에서 화제가 되는 영화나 책은 꼭 봐둬야 직성이 풀린다. <친구>는 소문대로 재미있는 영화임에 틀림없었다. 한껏 물오른 유오성의 연기, 장동건의 변신 노력, 화면에 육박하는 영상과 연기의 어우러짐, 계산된 연출의 승리, 경상도 사투리가 거두는 뜻밖의 질펀함…. 드디어 “마이 뭇다 아이가 고마해라…”는 저 유명한 대사가 나오면서 영화는 끝이 났고, 극장 여기저기서 여성 관객들의 훌쩍이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의자에 파묻힌 채 찬사일변도의 몇몇 비평가의 논평이나 미디어의 호들갑을 떠올리면서 어쩐지 찝찝한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미학은 있으되 감동은 없고, 재미는 있어도 고민은 없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소감이다. 사실 <친구>에 대한 논쟁은 이미 영화가에 두루 넘쳐 있는 터다. 저자의 직강(直講)이라고나 할까, 감독의 인터뷰도 두어 군데 매체에서 본 바가 있다.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관객의 수용이 달라 당혹해하는 소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감독은 작품으로 말해야 하고 해석과 수용은 관객이 몫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친구>는 퇴영적인 패거리주의의 예찬일 뿐이었다. 몇몇 장면의 미장센과 연기력이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열린 세계를 향한 비전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망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이 시점에 이처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정을 강조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물론 감독이야 그것은 내가 원한 바가 아니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남은 것은 영화 <친구>에 쏠리는 우리 사회의 ‘열광’인데, 이를 하나의 신드롬으로 볼 때 그것이 결코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정녕 영화의 주제가 ‘같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렵지 않다’인가. 정말 이 말은 나를 두렵게 한다. 패권적 지역감정, 저항적 지역감정, 반사적 지역감정 등으로 우리 사회에 미만한 지역정서를 분류한 이가 있었다. 글쎄 학문적 고찰로는 참 그럴듯한 것인지 모르겠다. 결국 모든 할거주의에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너도나도 패거리를 만드는 것을 조장하는 논리가 된다면 지나친 말일까. 힘센 주류는 ‘우리가 남이가’를 선창해 기득권을 선점하고 여기서 배제된 비주류는 또 자기방어를 위해 뭉치고 줄을 선다. 그 결과 무슨 향우회, 무슨 전우회, 무슨 동창회가 난무한다.

감독은 단지 자기가 잘 아는 자신의 성장스토리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대박을 터뜨리고 싶은 영화사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이면에 도사린 관객들의 음험한 배타적 패거리 심리를 교묘하게 건드리는 방향으로 마케팅한 것인가. 그래서 시중의 말대로 <친구>는 마케팅의 승리인가.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구>의 관객은 꾸준히 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친구>의 성공에 나 역시 박수를 보낸다. 다만 그 기획력과 작가정신으로 이제 보다 진지하고 생산성 있는 고민을 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가령 미완, 미결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치열한 도전을 제안한다. 한국영화여, 이젠 그 정도의 자본력, 시장, 표현영역, 게다가 그 왕성한 마케팅력까지 자못 갖추지 않았는가.

정길화 MBC 시사교양국 차장 ·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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