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 2018-12-02   1352

[역사] 사라진 어느 ‘386’의 행적 발굴기_1

사라진 어느 ‘386’의
행적 발굴기_1

 

보통 삼백팔십육이라 읽지 않는 ‘386’은 한국에서 60년대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이 30대가 되었을 때 이루었던 세대 무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며 권력을 전취한 거악을 향해 맑은 분노를 품었던 세대. 그러나 학번을 기꺼이 정체성으로 취하고 마는 이중적 특권의식의 세대.

 

그들의 20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20대를 맞이했던 나는 ‘386’이라는 뭉툭한 정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80년대 학번의 어느 활동가를 만나게 됐다. 그는 비자발적 이유로 90년대 초반, 활동가의 삶을 멈추었는데 그가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던 여러 조건들은 이 사회가 지닌 한계의 단면을 충분히 드러내고도 남았다. 이에 한국 사회의 민주화과정에서 주요한 시기였던 80년대, 지난 그의 행적들을 두 차례에 걸쳐 채록해두고자 한다.

 

1983년, 삼민투 결성

고교시절 현악동아리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기타를 쳤던 그가 음악도의 꿈을 접고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82년이었다. 유신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흐릿한 광주 항쟁의 소문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때 청소년 시기를 보낸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어떤 사회를 만났을까. 

 

그는 “총칼로 만들어 놓은 공포를 뛰어넘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던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미뤄놓고 헌신하다 잡혀갈 수도 있고 또는 죽을 수도 있고, 근데 그런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자존감으로 신군부독재시대에 맞섰다.  

그의 학생시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2년 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날, 신군부에 의해 전국 계엄령이 내려지던 때에 전국 56개 대학 학생회장단이 최초로 모여 시국토론회를 가졌었다. 

 

전국총학생회장단은 16일 새벽, ‘정상수업을 받고 시위를 일단 중지한다’는 고려대에서의 결의를 재확인하는 한편, 현 시국 추이에 따라 시위방법을 바꾸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일부 지방대학생들이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와 같은 적극적인 시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서울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자제론을 폈다.

-1980년 5월 17일 <중앙일보>

 

학생 대표들이 밤샘 토론 후 내린 결론은 시국관망 후 수업 정상화였다. 바로 사흘 뒤 광주에서 시민들을 향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학생들이 스스로 물러서 버린 이 결정은 반독재 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학생들에게는 상흔에 가까운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진심만으로 역사가 전진할 리 없다는 생각들을 한 젊은이들이 도처에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형, 삼민투 같이 합시다.” 그가 대학 2학년이 되던 83년, 그는 선배에게 80년대 초반 학원에서 결성되던 모임을 함께 하자고 먼저 제안했던 후배였다. ‘삼민투’는 민주, 민중, 민족,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인 말로, ‘군부독재 타도와 민중민주정부 수립 및 민족 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원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80년대 초반 대동제나 농활로도 바쁜 학생회로는 부족한, 선도적이고 선명한 싸움을 하고 싶은 학생들이 만든 ‘투쟁위원회’였다. 

 

그는 삼민투 사무실 한 켠에 클래식 기타를 꽂아 놓은 채 “사람이 없어서” 1984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❶ 위원장, 총학생회 사회부장을 겸임하며 84년과 85년, 그가 다니던 학교 이름이 들어간 성명서란 성명서는 예외 없이 다 직접 썼고 수배가 떨어졌을 때도 집회를 주도했다. 그는 85년 9월 신군부의 유화조치 해소와 함께 수배되면서 동 학교에서 유일한 제적생이 되었고, 가장 자주 감옥을 들락거리는 운동권이 되었다. 

 

그가 참여했던 삼민투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전국학생총연합(이하 ‘전학련’)이 상설 투쟁기구로 삼았던 것으로, 85년 미문화원 점거를 주도했던 삼민투가 아닌, 재건 삼민투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여러 성향들이 혼재되어 있던 삼민투는 이후 자민투, 민민투 등으로 분화되어 NL/CA/PD 등 학생운동권 분파의 기원이 되는데, “말로만 싸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혁명론이라는 웃기는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운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20대 운동론의 기반은 “1년을 살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권리”였다.

 

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호(통권 261호)

1985년 4.19 시위, 왼쪽 편에서 플랭 카드를 들고 서 있는 그의 얼굴이 보일듯 말듯하다   출처 중앙일보 

 

1985년, 민주정의당 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80년대 중반 주요 시설의 점거 농성은 학생운동의 의사표현 방식이었다. 삼민투의 학생들은 ‘주타격방향’을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으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학생운동에 있어 그의 마지막 사건은 85년 11월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 사건이 되었다. 과장되거나 미화된 무용담이 되기 십상인 당시 숱한 학생운동사건들은 그의 증언을 통과하면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연수원 건물 달랑 하나 있는 송파의 허허벌판에서 이백여 명의 학생이 호루라기 불고 달려 들어가자, 입구에 있던 전경 두 명이 깜짝 놀라 사과탄 몇 발 던지고 도망을 갔다. 정권이 크게 키우려고 몰아갔던 2층의 화재 사건은 방화가 아니라 동국대생들에 의한 실화(失火)였으며, 그렇게 쫓겨 올라간 옥상에서 문을 잠가 둔 채 영하 날씨에 퍼부어 대는 물 대포 때문에 모두 덜덜 떨고 있었다. 몇 시간을 버텨봤지만 너무 추워서 끝까지 못 잡아 갈 것 같아 그냥 잡아가라고 스스로 문을 열어줬고, 신나게 맞은 다음 뿔뿔이 흩어져 조사를 받았다.”

 

경찰 2,100명과 소방차 8대가 동원돼 진압된 점거 농성에서 참여했던 191명 전원이 구속되었다. 반성문을 쓰고 풀려난 절반 이상의 학생들을 고려하면 실제 재판으로 이어진 구속자는 82명으로 줄었는데, 그는 재판 거부투쟁 등을 지속하며 군부정권과 타협하지 않은 채 2년을 선고 받았고, 1987년 7월 초에 출소했다. 그는 87년 민주항쟁을 감옥에서 지켜봤다. 

 

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호(통권 261호)

1985년 11월 민정당연수원 점거 농성 사건은 그의 마지막 학생운동 활동이 되었다  출처 경향신문   

 

※ 「참여사회」 2019년 3월호에서 이어집니다. 

 

 

❶ 대학 총학생회장 직선제 전환을 위한 협의기구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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