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485

꿈을 저당잡힌 슬픈 자화상

꿈을 저당잡힌 슬픈 자화상

IMF 이후 신문과 방송은, 특히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는 지방 일간지나 지역민방, 케이블 텔레비전 등의 언론매체는 이른바 ‘광고’로 대표되는 자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게임에 돌입한 이들은 어떻게든 광고를 유치해 살아남아야 한다. 예전에는 어르고 뺨칠 수 있는 언론권력이라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밑바닥 자존심을 다 버리더라도 자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광고형 ‘기업칭송’ 기사는 물론 기자들이 기사를 미끼로 광고영업까지 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식의 ‘자본의 언론 길들이기’는 중앙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부도위기를 맞은 각 언론사가 앞다퉈 광고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는 IMF 이후 신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부 기자는 줄고 경제부 기자가 는 것’이라며 이는 신문사 광고전략이라고 꼬집는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기자와 PD들은 어떻게 자본에 시달리고 있을까?

취재를 바탕으로 소설처럼 각색했다. 각 사례를 중심으로 자본에 짓눌려 일그러진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목도해 보자.

안방은 쇼핑전쟁중

늘 버려진 아이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던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직업을 적극 활용해보기로 했다. 그의 직업은 방송국 프로듀서. 그는 입양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입양은 우리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적 대안임을 말하고 싶었다. 많은 아이가 좋은 가정의 새 아들 딸이 되어 잘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는커녕 다큐 PD로서 자긍심조차 잃어버리게 될 지경에 놓였다.

방송경력 7년차인 양상규 PD(가명)는 단돈 300만 원만 협찬받으면 이 휴먼 다큐의 메가폰을 쥘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스폰서를 찾지 못해 오늘도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

“이미 끝났다. 제대로 된 다큐 작품 하나 만들겠다고 다큐 채널을 선택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이젠 내 가치관마저 흔들린다. 협찬을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을 할 수 없고, PD는 작품보다 협찬끌기에 온 신경을 써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 정말 가슴이 아프다."

자조적인 양 PD의 웃음이 허허롭게 방송국 로비를 맴돈다.

그와 뜻을 같이했던 한 후배는 이런 현실을 진작에 간파하고 진로를 바꿨다. 그는 몇백만 원을 받고 홈쇼핑 프로그램을 매주 제작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많이 팔리나 하는 생각에 여념이 없다. 후배는 이미 장사꾼이 되어버렸다. 그 후배의 모습은 우리 케이블 TV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싶다.

채널을 변경할 수 있는 시기에 직면한 케이블 TV는 지금 쇼핑 물결에 휩싸여 있다. 홈쇼핑 프로그램 CATV 업체들은 이렇다.

오락채널 HBS, 여성채널 동아TV와 G-TV, 다큐 채널 CTN, 교육 채널 마이TV, 경제 채널 매경TV, 여기에 39쇼핑과 LG쇼핑을 합치면 무려 7개 업체. 가히 안방은 쇼핑전쟁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좇는 방송의 일상이 어찌 비단 케이블 TV뿐이랴…. 지상파의 경우 개편 때마다 협찬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우선 편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IMF 이후 그 양상은 더 극심해지고 있다.

사오정 PD의 해외출장 기획서

가제 <아시아의 가족, 과연 붕괴되는가?> 교양제작국의 이문수 PD(가명)가 제출한 기획안의 겉표지를 장식하는 가제. 차장은 뜬금없는 아시아의 가족에 이게 뭐지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몇 장을 넘겨보았고, 미국, 유럽 각국이라는 글자에 눈이 휘둥그래져 급기야 여러 장을 훌쩍 넘겨 견적서를 본다. 견적서엔 3,000만 원 정도의 총견적비에 해외출장비가 80%를 넘고 있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런 기획서를 내? 사오정 PD가 아니고서야 이런 기획서를 제출할 수 있냐? IMF 시대에 이런 발상을 할 줄이야…." 담당 차장은 IMF 이후 돈에 시달리는 방송 프로그램의 상황을 ‘강 건너 불’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이 PD에게 싫은 소리를 퍼부었다.

“기획이야 그럴 듯하지…. 그런데 요즘 같은 IMF 시절에 협찬을 구할 수 있겠어? 문제는 돈이야. 돈 없으면 뭘 할 수 있겠니? 협찬 딸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관둬."

이 PD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돈 앞에서는 그 어떤 소중한 가치관도 다 버려야 하는 슬픈 현실에 목이 메었다. “이 기획을 위해 1년 반이나 연구하고 자료조사했는데 여기서 접어야 하다니, 그것도 다름아닌 돈 때문에….” 그의 괴로움은 콧등을 빨갛게 물들였고 이내 한 방울 눈물로 떨어졌다.

외압따라 바뀌는 논조, 기자는 피곤해!

박찬우 기자(가명)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부산하다.

노조 총회에, 자동차회사 파업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인데, 그래도 노조 총회에서 목청껏 우리의 생존권을 되찾자고 뜻을 밝혀 속은 시원한 판이었다.

헐레벌떡 달려간 파업현장엔 노사정위의 결론이 임박해 있다.

이윽고 열리는 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합의했습니다. 파업은 이제 끝입니다." 힘겨운 목소리로 노조 부위원장은 기자들에게 어떻게 합의지점에 이르렀는지 설명했다.

‘그래, 이거야.’ 박 기자는 「현대자동차 대타협! 새로운 노사국면 개척」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기사를 빠르게 전송했다.

부산한 편집국 사무실.

“타협했다며? 타이틀이 뭐야? 보자고, 현대자동차 대타협! 새로운 노사국면 개척… 음!"

그 순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편집국장은 고개를 외로 꼬고 전화를 받은 후 “음… 네… 그래요…" 하는 말을 흩뿌리고서는 전화를 끊었다.

“타이틀 바꿔!"

“네?"

“타이틀 바꿔, 지금이 5~6공이야, 노사문제에 정치가 시도 때도 없이 개입을 하지 않나? 구조조정은 그럼 언제 해? 나라꼴이 이래서야…."

박 기자, 기사를 전송하고 난 후 파란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다.

하늘을 가를 듯 연기가 날아가고, 자신의 기사 한 줄 한 줄을 음미해보니 뿌듯한 미소가 퍼진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 기사는 잘 썼단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편집국에서 걸려온 몇 초의 핸드폰 통화에 얼굴은 금방 흑빛으로 변한다. 경영진이 개입해 ‘아’가 ‘어’로 둔갑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랴만은 벌어질 때마다 참으로 곤혹스럽다.

‘살고 보자’ 아래 짓눌리는 언론개혁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서는 언론지망생들에게 “진실로 기자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재고하라"고 충고했다. 그만큼 한국의 언론현실이 암울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도 개혁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언론개혁은커녕 오히려 언론과 자본, 권력간의 화려한 앙상블을 만들 뿐이다. 이런 가운데 편집권의 독립이나 방송주권의 회복보다 우선 ‘살고 보자’는 식의 자사 이기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 언론의 현재 모습이 참으로 서글프다. 게다가 자본과 유착한 경영진이 언론의 기본정신은 잊은 채 오로지 ‘돈이 되는’ 상업논리에만 빠져 일선 기자와 PD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더욱더 우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일간지 기자가 한숨 섞어 전하는 읊조림은 더욱 가슴을 멍들게 한다.

“노예죠…. 돈의 노예, 조직의 노예, 꿈을 저당잡힌 이 땅의 노예."

오늘따라 광화문 네거리의 바람이 더욱 음울하다.

서선미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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