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986

미국이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

미국이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

사실 『참여사회』 편집부에서 이 원고를 제안해 왔을 때,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한국 사회에서 미국문제에 관해서는 점잖게 튀지 않게 말할 수 있는 테두리가 너무 작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 어떤 테러집단의 테러행위보다 미국의 국가테러가 더 야만스럽고 흉포하며 더 철저히 응징되어야 할 범죄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의 국가테러에 동조해오거나 침묵으로 지원해온 한국의 엘리트들을 불신하며 그 대가로 한국의 국가테러를 지원해온 미국의 범죄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미국의 국가테러에 침묵하며 민주화나 사회개혁 또는 진보를 말하거나, 미국과 한국의 상호테러 지원관계에 침묵하는 시민운동·사회운동도 신뢰하지 않는다. 또 이런 의견을 피력할 때마다 제기되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물론 모든 테러에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하다”는 방어적 사족을 붙여야 하는 현실도 그냥 비웃어 외면하고 싶다. 또 멀리 이 영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백인숭배주의와 이슬람계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무슨 글을 쓰랴 포기하고 싶었다. 그 동안 미국의 국가테러에 동조해온 한국 사회에서 아무것도 못했으면서 글은 무슨 글, 이런 비애감이 강했다.

미국에서의 테러와 미국의 전쟁 도발. 9월 11일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미국이 당했기 때문에 부각되었을 뿐이다. 미국과 관련된 테러와 비극은 수없이 많다. 레이건의 집권시절, 당시 미국은 리비아를 폭격하고 그레나다를 침공했으며, 그를 이은 부시행정부는 이라크와 파나마를 공격했다. 클린턴 집권 당시 미군은 수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세르비아에 폭격을 퍼부어 수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미 중앙정보국은 1940년대부터 제3세계에서 암살단을 조직, 훈련, 무장시켜 체제전복과 정치변동을 획책해왔다. 존슨 대통령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램시 클라크의 고백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범죄는 미국의 대외정책”이었다. 미국의 범죄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국가 테러의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물결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괴리가 더 진짜 현실이다.

미국이 당했기 때문에 특별히 부각되는 면을 제쳐놓고 본다면 9월 11일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런 테러가 앞으로 일상현실이 될 것인가? 미국은 왜 이렇게 증오스러운 존재인가?

테러리즘의 일상화와 특정국가에 대한 증오는 동전의 양면이고 온갖 속임수로 가려져 있다. 손자가 말했듯이 모든 전쟁은 속임수이기 때문에 전쟁을 벌이려는 미국과 미국에 대한 증오를 논의하는 데에는 ‘테러리즘’이라는 규정의 속임수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면 이미 미국은 세계 최악의 테러국가이며 매우 배타적인 국민의식을 갖고 있으며 전체 국가체제가 전쟁 기계화된 국가이다. 미국은 견고하고 세련된 범죄국가이다.

클라크 검찰총장, 2차대전 이후 최대 범죄는 미국 대외정책

나는 테러리즘과 관련된 속임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작년부터 알게 된 팔레스타인의 한 학교 선생님 왈리드와 오늘 이런 얘기로 말문을 열며 인터뷰했다. 그의 부모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데, 미제 M16과 장갑차의 총탄에 친척과 친구들 여럿을 잃었다. 왈리드는 40대 중반의 선량한 교사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슬람교도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을 동일시하는 걸 넘어서 왜 미국을 원흉으로 보는지, 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자살특공대에 자원하는지, 그리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 이후에 왜 그 자원자들이 늘어날지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막을 생각이 없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미소 지으며 “세상에는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만 답한다. 이건 속임수도 아니고 전쟁도발도 아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다.

미국에 대한 공격이 있던 날, 나는 북경대 국제정치학과 학생과 밥을 먹고 있었는데 며칠 후 그 학생은 흥분해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테러 공격 다음날 북경대 한 교수는 “학생들 기쁜가?”라며 화제를 꺼냈는데 일부 미국인 학생을 제외하고는 상당수가 통쾌한 느낌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 중국 정부는 이 사건에 환호하는 중국 네티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랍권뿐 아니라 중남미·아프리카·아시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쪽에서는 점잖은 정치인들과 언론이 테러에 대한 규탄과 미국의 군사행동에 지지를 표명한다. 그러나 그 수면 밑에서 사람들은 ‘미국은 당할 만한 짓을 했다’고 조용히 그러나 줄기차게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러고 있다. ‘미국은 당할 만한 짓을 했다’는 표현은 『참여사회』를 위한 걸러진 표현이다. 미국에 대한 증오의 실태는 훨씬 심각하다. 지구촌 수면 밑의 현실은 언론 보도와 너무나 다르다. 이런 현실에 대해 서구사회 상층과 서구를 숭배하는 사회만 눈감고 있을 뿐이다.

9월 11일 이후 국제정치는 눈감기와 속임수의 연속, 즉 언어와 조작기술의 정치이다. 부시와 블레어가 “(이 테러는) 문명사회에 대한 공격이다”, “영국뿐 아니라 전체 문명사회가 테러리즘의 응징을 지지한다”라고 역설할 때 그들은 문명사회의 안보가 위태롭다는 비상벨을 울리는 것이며 테러리즘은 야만사회에 속한다는 메시지를 반복 생산함으로써 ‘우리’와 ‘놈들’을 구분 짓고자 애쓰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우리’와 ‘문명’이라는 정체성은 비서구사회를 기독교의 시각에서 야만시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권국가의 최고과제를 그 문명국가의 국가안보로 설정하게 된다. 문명과 우리, 그리고 안보의 역사는 바로 놈들과 야만, 그리고 기독교화와 정복의 역사와 병행한다. 9월 11일 이후 그 문명과 그 안보가 위협을 받았으니 놈들을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자살특공대를 자원하는 이유

이런 전통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일 겪는 공포와 죽음은 부시와 블레어가 말하는 문명사회와 무관해 보인다. 이런 속임수가 있어야 전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전통에 따르면 지구촌은 미국과 소수 동조자들의 문명사회와 수면 밑의 야만사회로 나뉠 것이다. 그리고 이 야만사회의 인간 개개인의 안보는 매일같이 위협받고 있어도 별문제 아니다. 자폭 여객기나 폭탄트럭의 테러공격이 없이도 이들의 삶은 매일같이 위협받지만 1분짜리 묵념도 싸구려 촛불도 켜지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서구 식민지 유산과 세계적인 자원 약탈 그리고 세계자본주의가 야기한 불평등과 궁핍으로부터 매일같이 그 안위가 위협받고 있어도 안보의 관심사가 못 된다. 빈곤에 대한 전쟁선포,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 성조기를 흔드는 미국인들에게 이 야만세계의 안보위협은 그저 모금대상의 불쌍한 현실일 뿐이다. 반면 “미국인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들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한 미국 병사의 말처럼, 또 “(아프간 폭격으로) 아무리 많은 민간인이 죽어도 좋다”는 한 미국 상원의원의 말처럼 미국인의 생명은 무한히 고귀하다. 문명인이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답하는 선량한 왈리드의 눈에 경멸의 빛이 지나갔다. “지금 전세계는 매일같이 뉴욕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 이야기를 조목조목 방영하고 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렇게 주목해본 적 있느냐. 무시당하는 것,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뿜어내는 반미의 에너지는 바로 이 무시당함에서 나온다.” 그렇다, 세계는 서구언론의 힘을 통해 매일같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지만 이 과시적인 애도가 그 동안 무시당해온 사람들에게는 자기 형제와 부모, 친구들의 죽음을 상기하고 분노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은 사망자 보도를 통해서조차 증오를 재생산해내는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사람 죽을 때마다 너희는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는 말을 미국 병사가 아니라 나나 왈리드가 했으면 우리는 당장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라고.

9월 11일 이후 국제정치의 언어는 테러와 문명의 기로에서 좌우로 진동하고 있다. ‘무고한’ 미국인들에 대한 애도는 ‘테러리즘’에 ‘공격’당한 ‘문명사회’의 애도와 결의이며, 미국이라는 전쟁 기계를 가동시키는 에너지원이다. 일부 구미의 종교지도자들이 이슬람이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은근히 경고하지만, 부시가 미사에 참석해 전쟁결의를 다지고 이에 응답하여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와 “신이여, 아메리카를 축복하소서”를 눈물겹게 합창할 때, 이미 여호와는 아테네 여신과 결합해서 영적으로 무장한 상태이며 오래된 문명과 야만의 금긋기는 정교일치를 통해 재탕되고 있는 셈이었다. 왈리드가 말하는 ‘무시에서 오는 반발’은 바로 서구 기독교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자행되어온 문명과 야만의 금긋기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테러리즘 문제는 미국과 같은 국가의 국가테러와 빈 라덴 그룹과 같은 비국가테러가 결합된 한 쌍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부시와 블레어가 말하는 테러리즘은 바로 현 국제체제의 국가테러의 반작용이며 선진국 중심의 국제정치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이며,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국가테러가 존재하는 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며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성질의 것이다. 테러리즘이 적이라면 이 새로운 적은 국가도 영토도 정부도 갖지 않는, 국제적이면서 동시에 국내적인 세력이며, 군대와 민간을 구분하지 않는 등 전쟁에 관련된 문명사회(?)의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적이다.

중동의 소위 테러리스트 상당수가 한때 미국정부의 중앙정보국에서 훈련시킨, 즉 국가가 훈련시킨 ‘현지요원’들이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다수 나라가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 테러리즘을 만들어내고 또 이를 해결 못하고 그냥 안고 살고 있는 현실로 볼 때 테러리즘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일부분이다. 적-아의 언어를 포기하고 말하자면 테러리즘은 단순히 우리 체제의 일부분일 뿐이다. 즉 테러리즘은 ‘우리’도 ‘놈들’도 아닌, 이런 이분법을 무시하는 어정쩡한 여러 경계에 걸쳐져 있다. 국가 테러리즘은 이 어정쩡한 우리 체제의 일부를 ‘놈들’로 규정하며 우리와 놈들의 경계를 다시 긋고 문명과 야만의 정복사를 반복하려 하고 있다.

증오의 씨앗을 뿌려온 미국의 역사를 알면

미국을 테러국가라 지칭하지 못하고 응징하지 못하는 것은 주로 힘의 논리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지도층은 이 힘의 논리를 국제정치의 논리로 수용하고 있지만, 미국의 힘의 논리는 미국의 붕괴를 가져오는 힘이라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쟁선포는 국가와 군대를 움직이지만 일부 미국인들 이외의 세계 대다수 인구의 마음은 전혀 사로잡지 못한다. 오히려 증오만 증폭시킨다. 이제 세계는 미국의 가치가 온통 속임수라는 걸 안다. 미국의 자유는 가진 자들이 남에게서 도둑질한 자유이며, 미국의 민주주의란 미국인들의 이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민주주의이며, 미국식 번영은 핵무기를 가진 패권국가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국가안보 행위로 칭송되는 걸 깨닫고 있다. 더구나 팍스 아메리카나가 자신의 안전을 더 이상 지켜주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가고 있다. 현대 테러리즘의 수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9월 11일 테러가 인명살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경미한 테러 수준이라는 것을 안다. 최근 무기개발의 수준을 볼 때 (이를 주도하는 것 역시 미국 기업들이다) 인명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21세기의 테러는 훨씬 잔혹할 수 있다. 전쟁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들은 항상 적과 국가안보, 애국과 단결이라는 언어로 국민을 선동하겠지만, 미국의 전쟁도발로 국제 테러리즘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안보문제는 21세기 테러리즘 앞에 상당히 무력해질 것이다. 그 근본원인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이름도 없는 상대를 굳이 ‘악의 세력’이라 몰아세우며 세기적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모습에서, 모든 적을 꺾은 후 노쇠한 자기 몸의 일부와 투병하는 노병의 모습, 또는 노예의 반란과 싸우다 지친 듯한 노쇠한 로마제국을 연상하는 것은 비약일까. 비약이든 아니든 9월 11일에 관련된 모든 논쟁은 한국 사회에 중요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 판단의 한가운데에 왜 미국은 세계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미국 숭배가 유달리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균형감각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증오의 씨앗을 뿌려온 역사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최소한의 성실성만 있다면, 미국이라는 국가가 세계 도처에서 벌여온 더러운 전쟁과 범죄의 기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폭력과 범죄의 기록을 미국의 번영과 미국의 안보에 대비시켜 성찰한 다음, 제3세계의 비극과 빈곤과 불안을 함께 생각한다면, 미국에 대한 세계적인 증오는 그 맥락이 잡힐 것이다. 더불어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민정부’의 대통령이 첫 외교나들이로 미국 의회에 가서 미국은 생명의 은인이자 민주화의 은인이라고 칭송하는 그런 한국정치의 맥락이 잡혀질 것이다.

미국의 실체와 군사력은 한국의 태동 및 번영과 긴밀한 연관을 가져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국가테러 문제는 그냥 한 가지 국제이슈로 처리될 수 없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는 본격적인 ‘미국 바로 알기’가 필요하며 그에 기초해서 미국에 대한 윤리적 지성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는 미국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서양, 근대, 번영, 안보에 대한 환상 깨기이며 이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이대훈 영국 브래드포드대학 평화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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