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1-01   944

누가 이들을 죽였는가

1984년 4월 2일 오후 1시 20분경 제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본부에서 30m 떨어진 폐유류고 위장대에서 가슴과 머리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죽어 있는 허원근 일병이 발견되었다. 군은 허씨가 ‘중대장 전령으로서 중대장의 가혹행위와 군대생활에 대한 염증’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허원근 일병은 당시 중대장 당번병으로 첫 휴가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허씨는 80년 광주항쟁 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으로 시민군에 참여해 부상을 입은 경력을 갖고 있었으며, 대학 재학중 이른바 ‘지도휴학’으로 군에 입대했다. ‘지도휴학’이란 당시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학교 당국이 휴학을 ‘권했던’ 관행을 말한다. 따라서 허씨의 경력이 군대에서 문제가 될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일어나 스스로 확인사살했다니…”

허씨는 발견 당시 가슴 양쪽에 2발, 머리에 1발 등 모두 3발의 총을 맞은 상태였다. 살상력이 강한 M16 소총으로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3번이나 사망자가 스스로 총을 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당시 군의관은 소견서에 “먼저 허군은 총구를 오른쪽 가슴에 밀착하고 격발하여 총알이 등쪽으로 관통하였으나, 자살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심장에 가까운 왼쪽 가슴에 다시 격발하여 총알이 겨드랑이쪽으로 관통했다. 그러나 역시 의식이 남아 있어 비스듬히 누운 상태에서 총을 오른쪽 눈썹에 밀착시키고 격발하여 사망했다”고 적어 놓았다.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군의 ‘자살’ 주장에 허씨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고 묻자 육군과학수사연구소 한 관계자는 “총을 일곱 발이나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며 “직접 보여주랴”고 말했다 한다.

더욱 납득이 되지 않은 것은 허씨의 가슴 양쪽 피 색깔이었는데, 왼쪽 피는 검게 굳어 있었고, 오른쪽 피는 빨갛게 흐르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가족이 의혹을 제기하자 군 관계자는 “(양쪽의) 혈액형이 다를 수 있다”는 상식 밖의 대답을 했다고 한다.

피가 굳어 있었다는 것은 총을 맞은 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어디선가 왼쪽 가슴에 총을 맞은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오른쪽 가슴과 머리에 다시 총을 맞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욱이 현장사진에서는 마지막으로 쏘았다고 발표된 머리와 총구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사고 당시 부근의 병사들은 세발이 아닌 두 발의 총성만을 들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증언은 이후 번복되어 세 번의 총성을 들었다는 진술로 바뀌었다.

허씨의 아버지 허영춘 씨(유가협 의문사지회장)는 그 후 17년여 동안 단식, 삭발, 농성, 청원 등 아들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있지만 죽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왜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죽음. 이러한 죽음을 의문사라 부른다. 유가협과 추모연대 등 사회단체들이 의문사로 파악하는 사건의 대부분은 허씨의 경우처럼 자살 또는 사고로 처리되어 있다. 이들은 산속, 철로변, 저수지, 동굴 속, 바닷속 등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후 적법한 수사와 부검을 받지 못한 채 자살 또는 사고사로 발표되었다.

의문사는 경우에 따라 길게는 30여 년, 짧게는 5년여의 세월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죽음들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유가족들의 422일 간의 천막농성 끝에 지난해 12월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법 제정 이후 시행령이 제정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제정된 특별법은 의문사 진상을 밝히는 데 핵심적인 규정을 포함하지 못해 앞으로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의 한계로 작용할 우려도 있다.

현재 유가협과 추모연대가 진상규명을 요구할 의문사 사건은 장준하 선생 사건 등 총 44건이다. 이 중 5건이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 공안기관 관련 의문사이고, 22건이 군 관련 의문사, 17건이 경찰 관련 의문사이다.

조작간첩 사건의 희생양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최초의 의문사’로 불린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시기였던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박정희정권은 국내외적으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게 됐고, 대학에서는 반유신 시위가 그칠 줄 몰랐다. 서울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경찰은 학내에 진입해 시위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신독재에 비판적 입장을 가져왔던 최 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 된다” “서울대 총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최 교수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소환을 요구받게 된다. 당시 최 교수의 동생이 중앙정보부 직원인데다, 단순한 조사 협조라고 생각했는지 최 교수는 자진해서 중앙정보부에 출두했다. 그러나 출두한 지 50여 시간 만에 최 교수는 주검이 되고 말았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유럽거점간첩단’의 일원으로 조사를 받던 중 간첩임이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정황으로 볼 때 중정의 ‘자살’ 발표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다.

무엇보다 좁은 화장실에서 수사관들의 감시를 받는 사람이 말릴 틈도 없이 화장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주장이다. 최 교수가 투신했다는 화장실 창문의 높이는 150cm. 같은 공간에서 실험한 바에 따르면 162cm의 작고 뚱뚱한 최 교수가 2명의 수사관들을 4∼5m거리에 둔 채 잠긴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개 이상의 동작이 필요하며, 그 정도의 시간 동안 감시하던 수사관은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뿐 아니라 사망시간 등 주요 사실에 대해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렸으며, 사체사진에는 고문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 동생 최종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최 교수가 밤에 투신했다고 하는 지점을 새벽에 동생 종선 씨가 몰래 가보았으나 핏자국은 물론 이를 씻어낸 흔적조차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이른바 ‘유럽거점간첩단’ 자체가 조작 의혹이 짙었다. 실제로 수사가 종결됐을 때 간첩죄로 구속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와 같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의 가족들은 중앙정보부로부터 협박을 받아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 사건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나서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최 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사인진상규명에 나섰다. 88년 사제단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관련자들을 고발했지만 수사는 겉돌았고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선언했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 아래서 벌어진 조작간첩 사건 등 공작정치와 고문 등 인권유린의 실태를 보여주는 의문사로 남아 있다.

87년 군에서 사망한 최우혁 씨. 군 당국은 1987년 9월 8일 오전 0시 50분경 육군 20사단 예하 60여단 최우혁 이병(서울대 서양사 84, 4월 8일 입대)이 부대 내 쓰레기 소각장에서 분신하여 이송중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헌병대는 최 이병의 사망은 개인적 고민에 의한 자살이며, 전신화상과 점화당시의 질식이 직접적 사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정황에 비추어볼 때 최우혁 이병의 죽음은 자살로 보기 어렵다.

병영서 대공서적 읽다가 적발, 의문사

군은 최씨의 장례를 끝낸 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최씨가 사망 일주일 전 2급 기밀문서 초안 15장을 정서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실수로 그 중 9장을 소각해 버리고 두려워서 고민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왜 이제서야 밝히느냐는 가족의 항의에 당국은 장례식 당일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답변했다. 최소한 하루 한 번씩 점검해야 하는 기밀문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사실이 없었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그런데, 최근 최씨의 상사였던 한 사람은 최씨가 근무시간에 대공 서적을 읽다가 보안대에 적발이 되어 자신이 보안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고 말했다. 유가족이 보안대에 이 사실을 추궁하자 그들은 그런 사실이 없으며 최씨가 학생운동을 한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씨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해 수차례 구류를 살았고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 따라서 ‘최강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보안대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만약 최씨가 대공 서적을 읽다가 적발됐다는 상사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최씨는 보안대에 의해 심한 문책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최씨의 왼쪽 손목에서는 움푹 팬 상처가 발견되었다. 군은 최씨가 사망 수 시간 전에 자해를 기도했기 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주장했으나, 최씨의 동료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부검 결과 최씨의 위장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는데, 이는 최소한 하루 이상을 굶었다는 것을 뜻한다.

경찰 연행 뒤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

86년 사망한 신호수 씨(당시 24세, 인천 연안가스 노동자)는 경찰에 연행된 뒤 행방불명됐다가 8일 만에 고향 근처인 여천 대미산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신씨는 방위병 시절 포상받을 생각으로 북한 삐라 30여 장을 모아두었는데(이는 함께 자취를 하던 동료에 의해 증언되었다), 제대하면서 이를 잊고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신씨가 살던 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이 이를 발견,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신씨는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경찰이 신고를 받은 85년 9월 신씨를 곧바로 연행하지 않고 다음해 6월에야 연행했다는 점이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경찰은 신씨에 대한 신고를 받은 다음날 ‘장흥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사건에 대한 기안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신씨 사건을 조직사건 등으로 확대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는다.

경찰은 신씨를 연행한 후 4시간 만에 훈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연행한 신씨를 4시간만에 풀어줬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 대공사건을 기초조사하고, 자술서를 쓰는 데 4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일반적인 수사관행에서 벗어난다.

그 밖에도 신씨가 자살했다고 보기 어려운 의혹들은 많다. 우선, 인천에서 성실히 근무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향에 내려와서 집 근처의 험악한 산으로 올라가서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경찰에 연행된 후 변사체로 발견되기까지 8일 간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자살 시기를 사체 발견 4∼5일 전으로 추정한다 해도 남는 기간 동안 신씨를 만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그의 사체가 발견된 동굴은 높이와 형태상 혼자 목을 매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 같은 유가족 측의 주장이 있고 난 후 동굴에는 목을 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돌이 옮겨져 있었고, 작은 돌로 바닥이 메워져 천장의 높이가 낮아졌다.

또한 최초로 사체를 발견한 방위병은, 발견 당시에 사체는 목이 입고 있던 바지로 감겨 있었고, 두손은 한데 모여 있었으며, 가슴과 두 팔은 허리띠로 묶여 있었다고 말해, 도저히 목을 맬 수 없는 상태였음을 증언한 바 있다. 당시 변사체를 확인한 지역 주민 역시 “사체를 살펴보니 백색 면양말을 신었는데 양쪽 발목이 피로 얼룩져 있었고 무릎에 상처가 있었으며 양쪽 팔목에는 잉크색의 멍이 들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살의 의혹에도 경찰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3일만에 사체를 가매장하고 일주일 후에야 가족에게 자살 소식을 통보했다.

위 사례는 의문사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더욱 참혹한 상태로 발견된 사람들이 많고, 더욱 많은 의혹을 남긴 사건도 많다. 과거의 잘못을 그냥 두는 것은 미래에 똑같은 잘못이 벌어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이며, 그때의 피해자는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 더 이상 이런 죽음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부터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제한된 조건 아래서도 이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길 바란다.

인터뷰 ㅣ 허영춘 유가협 의문사지회장

"유가족들 오랜 한 풀어주길 …"

김유진 자유기고가

허영춘 유가협 의문사지회장은 고(故) 허원근 씨의 아버지다. 83년 아들이 군대에서 의문사당한 후 17년여의 세월을 오직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왔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에 대한 소감과 당부를 들어보았다.

진상규명위원회에 거는 기대를 말씀해 주십시오.

"유가족 입장에서는 일단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위원회가 구성된 것이 고맙고 다행스럽지요. 하지만 과거처럼 흐지부지하지 말고 이번만큼은 한점 의혹 없이 진상을 밝혀주길 바랍니다."

일부에서는 진상규명을 비관적으로 전망하는데요.

"법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압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 일하는 분들이 열심히 해 줄 것으로 믿어요. 그리고법의 미비점은 앞으로 개정하면 된다고 봅니다. 우리 유가족들은 이미 법 개정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야 정당을 찾아다니면서 법 개정에 동의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고, 청원도 할 겁니다."

위원회는 ‘민관합동기구’입니다. 행정부처만이 아니라 가해자로 주장돼온 국정원이나 군에서도 참여하는데, 당부할 말씀은 없는지요.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처벌’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 달라는 것뿐이에요. 도저히 자살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을 두고 자살이라고 하니, 부모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일단 위원회에 참여하는 분들은 진상규명의 의지가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유가족의 오랜 한을 풀어주길 바랍니다."

위원회가 진상 규명하는 데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대통령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그 분도 의문사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민주주의가 안 된 사회에서는 누구나 의문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다시는 ‘의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우선 과거의 잘못을 밝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국민들 모두가 이 문제에 애정을 갖고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윤희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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