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09-08   1247

[인터뷰] 박원순 변호사

참여연대 10년 그리고 앞으로 10년, “나비같이 날아 벌같이 쏜다”

9월 10일로 참여연대는 창립 10돌을 맞는다. 지난 10년의 참여연대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참여연대의 지난 10년은 특정한 누구의 것은 아니다. 시대적 상황, 시민들의 열정적 참여와 후원, 그리고 이 전문가와 상근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현재의 참여연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빠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7년 동안 사무처장으로 참여연대 호(號)를 이끌었던 박원순 변호사를 만났다.

참여연대의 10돌에 대한 소감부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후딱 간 것 같죠. 뭘 했는가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어떻게 보면 또 너무 긴 세월이었죠. 그 사이에 있었던 사연도 너무 많고, 참여연대를 오갔던 사람들도 많구요.

개인적으로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정말 청춘을 묻었던 곳이고(웃음). 많은 간사들이 여기서 고생하고 심지어는 병나서 그만두고, 그런 많은 사람들의 인생역정이 함께 했던 곳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여연대는 한국사회 변혁에 큰 이정표를 던진 사회운동단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의 인생역정이 함께했던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창립 초기의 궁핍한 생활로 인한 에피소드는 지금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거리다.

“출근하면 책상 위에 쥐똥이 수북했던 용산 사무실 “

박변호사도 “기억나는 일이야 너무 많다”고 하면서도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때로 초창기 고생했던 시절을 꼽았다. 개소식을 하고 3년이나 지냈던 용산역 앞 사무실은 여러 모로 악명이 높았는데, 그중 첫번째가 ‘쥐떼’였다. 몇 소대의 쥐떼가 천장을 달리는 소리는 기마병의 진군소리를 연상시킬 정도였다니, 상황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쥐가 그냥 밤새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던 사무실이었요. 처음에는 책상도 없어서 같이들 쓰고 그랬는데, 아침이면 그 책상들 위에 쥐똥이 수북히 쌓여 있었어요. 오후가 되면 몸이 근질근질하고. (웃음). 그래도 그때, 고생했던 시절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만큼 단합도 잘 됐고, 새로운 것도 많이 시작했구요.”

초창기 시절의 어려움이 쥐들 뿐이랴. 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사무처장 자리니, 그는 다른 이들보다 몇배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분명했다.

“개인적으로보면 아무래도 사무처장이라는 자리는 이렇게 살림을 걱정하는데니까, 그런 것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죠. 나도 돈 만드는 것에는 영 재주가 없던 사람이었는데, 간사들 월급을 못 주는 날이면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전화하고 그랬어요. 그런 일들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좋았던 기억으로 남네요.”

“참여연대 성장동력은 회원, 임원, 그리고 간사들”

10년, 참여연대는 놀랍도록 성장했다. 200명의 창립멤버와 14명의 간사로 출발한 참여연대는 이제 1만4천여 명의 회원과 50여 명의 상근자, 그리고 200여 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함께하고 있다. 외적인 성장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창립 당시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긴 이름이 한번도 제대로 보도된 적이 없었던 참여연대는 이제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미 5-6년 전부터 한국사회에 주요한 사안이 발생하면 참여연대가 논평을 내기도 전에 이미 언론사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칠 정도. 참여연대가 이렇게 영향력있는 단체로 만든 힘은 무엇일까.

박변호사는 참여연대의 성장의 동력으로 회원과 임원의 열성적인 참여와 후원, 그리고 간사들의 헌신을 꼽는다. 특히 참여연대가 정부나 재벌로부터 돈 한푼 안 받고 지난 10년을 달려 올 수 있었던 힘으로 “회원들의 극성맞은 애정”을 지목했다. 꼬박꼬박 회비를 내는 것은 물론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때로는 상근자들이 당황할 정도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간섭하는 이들의 애정에 대해 그는 ‘극성맞다’고 애둘러 표현한다. 그들 ‘극성맞은 회원’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이는 일명 압구정 아주머니로 불리웠던 이옥숙 회원이다.

“기억나는 분들이 너무 많지요. 그중에서 이옥숙 회원이라고, 이분은 몇해 전 캐나다로 이민을 기셨는데요. 원래 압구정동에 살던 분이거든요. 그런데 제 강의를 한번 듣고 자원활동을 시작하신 이후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참여하셨는지 몰라요. 입술을 빨갛게 바르고는 간사들 도시락을 싸오시기도 하시고 그랬어요. 그때 자기가 옛날에는 캬바레도 가고 골프도 치러 다녔는데, 오히려 참여연대에서 바람이 났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진짜 캬바레에서 바람나면 큰일 날 뻔 했는데, 참여연대에서 바람났으면 얼마나 좋으냐라고 했어요.(웃음)”

일단 물꼬를 트자 그는 많은 회원들을 기억해 냈다. 회원모임 <청년마을> 초대 촌장인 최민섭 회원을 비롯해 그야말로 상근자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던 회원들에 대해 그리움과 고마움을 전했다.

“이해숙 회원도 기억에 남죠. 앵겔계수가 높은 간사들, 적은 월급을 먹는데 주로 투자하는 간사들을 위해 도시락 기금을 만드셨어요. 여러 분들께 직접 전화를 하셔서 모금하고 매월 간사들에게 식권을 나눠주고 하셨죠. “

임원들의 열정적인 후원과 참여가 없이는 참여연대 활동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원들의 열성적 후원이나 참여가 참 중요했던 것 같구요. 학자들, 변호사들이라든지, 우리 사회의 전문적 지식인들이 전문성에 있어서나 희생적인 열정에 있어서나 참여연대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어요. 참여연대가 정부기관이나 기업, 대기업에 잘못을 지적하면서 막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들이 모두 이 분들의 전문성과 희생 덕분이었어요.”

그리고 참여연대를 움직이는 힘으로 “간사들의 헌신”을 지목했다. 인터뷰를 하는 30여 분 동안, 그는 아파서 그만 둔 간사들에 대한 얘기를 몇 차례나 꺼냈다. 과로로 병까지 얻게 된 간사들은 그의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간사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정말 몸이 안 좋아져서 그만 둔 사람들도 많거든요. 이번 10주년에는 그런 사람들을 챙기는 홈커밍데이 같은 행사를 제대로 했으면 좋겠는데…”

박변호사는 간사들의 헌신을 말하지만, 간사들은 “그의 헌신과 열정”을 말한다. “한가지를 물어보면, 100가지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는다”는 박변호사의 열정과 끝없이 샘솟는 아이디어는 간사들에게 있어 즐거운 고통이었다. 밤을 낮 삼아 일해도 다 할 수 없는 일들, 그래도 또 하고 싶은 일, 새로운 일거리에 간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박변호사와 기꺼이 함께 뛰어왔다. 사무처장 시절, 절망한 적이 없느냐는 말에 그는 단호히 말한다.

“저는 좌절이라는 단어를 모릅니다.(웃음). 그래서 우리 간사들이 이러저러해서 안됩니다 이러면 제가 제일 화를 냈거든요. 왜냐면 안 된다는 것은 없기 때문에, 물론 세상에 절대적인 불가능이란게 있겠지요. 하지만 차선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럼 그렇게 해보면 될 것이고, 또 차선이 불가능하면 그 다음 단계의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있으면서 간사들 많이 괴롭혔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때문에도 막 병나고 한 간사들이 있지 않나 싶어요. 지금도 죄스러워요.”

”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해 제도화 해내는 참여연대의 힘 “

참여연대의 첫 사업은 사회복지분야였다. 사회안전망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입법청원했다. 이 법은 이미 제도화는 물론 시행되고 있다. 지금이야 입법청원을 비롯해 법률을 운동수단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시도였다. 사회운동하면 법률에 의해 억압되는 것만 상상했던 시대에, 법률을 보호와 근거수단으로 삼은 것 부터가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를 기억해 내는 박변호사의 목소리에는 어느듯 힘이 실려있다.

“하나의 아젠다라고 할까. 시민운동은 기본적인 비전을 갖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비전은 추상적이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어어야 하구요.

당시 참여연대가 사회복지 영역에 있어서, 특히 내세웠던 것이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이라고 해서 국민생활최저선운동이었거든요. 이른바 영국의 비버리즈가 말한 것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것이예요. 한국도 이미 국민소득이 만불인 나라잖아요. 삶의 질이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 있어야겠다, 그럼 그게 뭐냐 하면서 쭉 조사를 하면서 ‘국민생활최저선’이란 개념에 접근했죠.

그 개념을 추상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걸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했어요. 우선 기존의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나 전문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자고 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공익소송입니다. 본래 사회복지라는 것이 헌법상 보장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규정이다, 예산이 되면 준다, 아니면 그만이다 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참여연대가 “그렇지 않다”고 외친 것이예요.”

헌법이 나라의 근본법인데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헌법 위반이다’라면서 공익소송을 다 제기한 것이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는 패소했지만 법원에서 위헌가능성이 있다는 판결을 받은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렇게 참여연대는 시민 속으로 들어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국민생활최저선’ 개념의 최종단계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상정했고 이후 여러 단체들과 연대해 결국 입법화 해낸다. 이 법은 한국사회 최초의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다. 박변호사는 “많은 학자와 변호사들, 그리고 상근자들이 만든 멋진 작품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참여연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민생활최저선운동이라는 멋진 작품은 시작에 불과했다. 반부패운동, 정치개혁과 사법감시운동, 시민권리찾기운동, 재벌개혁과 조세개혁운동 등 참여연대는 수많은 아젠다를 던지고 또 그것이 제도화되는 시점까지 끈질기게 활동해 왔다.

사회적 의제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제도화까지 추진하는, ‘실사구시’ 스타일은 참여연대가 그간의 사회운동과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지점이다. 박변호사의 말로 하자면 “말로는 돌맹이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그런 과정에서 참여연대에게는 ‘고발연대’, ‘참견연대’, ‘불독’ 등등의 별명이 붙여졌다. 이러한 활동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았던 분야가 바로 재벌개혁, 즉 소액주주운동이다.

“소액주주운동, 법전 속에 숨어있던 조문 하나를 발견한 것 “

“그때 아마 이승희 씨를 경제민주화일을 하도록 배치를 했던 것이 기억나요. 당시엔 특정한 업무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나서, 우리가 이런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중심이 필요하겠다 해서 장하성 교수님을 모셔오게 됐어요.”

삼고초려 끝에 안식년으로 쉬고 있던 장하성 교수(고려대 경영학)가 경제민주화위원회(현 경제개혁센터)의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한국사회를 깜짝 놀라게 한 소액주주운동이 시작됐다.

“많은 교수들과 변호사들이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우리 경제 최고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고민했죠. 최고의 과제는 재벌개혁이다, 그럼 그에 대한 효율적인 수단은 뭔가, 그렇게 발견한 것이 바로 상법의 소액주주권, 즉 소수주주권입니다. ‘주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적은 수의 주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모이기만 하면 주주총회에 참여해 발언할 수 있다’는 조항을 발견해 낸 것이죠. 그걸로 주주대표소송도 제기할 수 있고, 주주장부열람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상법의 죽어있던 조문 하나를 일으켜 그야말로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이죠.

제일 처음 참석한 것이 제일은행 주총이었고 다음에 삼성전자였는데, 그때 가 보니까 제 앞에 카메라가 수백대는 있었던 것 같아요. 로이터 등 해외 언론사도 있었고, 그때가 IMF전후라 더 관심이 대단했죠.”

참여연대는 새로운 시위문화도 발견해 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일인시위’다. 지금에야 익숙한 형태로 자리잡았지만 이 역시 상당히 신선한 발견이었다.

2000년 12월, 참여연대는 삼성 이재용 씨에 대한 증여세 과세를 촉구하며 국세청 앞에서 시위를 준비했으나 100미터 이내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같은 건물에 외국인 공관이 있어 100미터 안에서는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어 있었던 것. 금지하는 법 조항을 꼼꼼히 읽어보다가 발견해 낸 것은 “2인 이상이 아니면 집회와 시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100일 간의 국세청 앞 릴레이 일인시위가 진행됐다.

“윤종훈 회계사가 제일 처음에 일인시위를 하고, 내가 세번째인가 네번째 했어요. 매일 사람이 바뀌며 릴레이 일인시위를 한 거죠. 이렇게 하니 정문 앞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 당시에 국세청장이 기자들에게 사진 찍힐까봐 정문으로 못 가고 뒷문으로 다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요. 일인시위가 실제로는 만명이 모인 집회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죠. 신기하니까 언론들이 많이 보도를 했구요. 이후 일인시위가 유행을 했죠. 변형시위라는 것도 나왔고, 그래서 시민운동에는 이렇게 끊임없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상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싶었다”

정확히 10년 전으로 돌아가, 1994년 참여연대는 어떤 기치를 걸고 탄생한 것일까. 그는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얻은 성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지난 87년에, 군사독재정권을 정말 민중의 힘으로, 시민의 힘으로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이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막상 민주주의 시대를 닥쳐보니까, 여전히 한계는 참 많더라구요. 그래서 이게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듯, 민주주의도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과거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민주화운동 재야운동은 참 의미가 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좀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를 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법치주의를 활용한 굉장히 유효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보다 인간적이고 좀더 민주적이고 삶의 질이 보장된 사회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참여연대가 ‘우리가 정말 그런 과거의 민주주의가 길거리 민주주의라면, 우리는 그 민주주의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이런 운동을 하자’고 선언하며 출발한 것이예요.

특히 참여연대가 초반기에 매달렸던 것은 제도적 민주주의에 제도를 고착화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입법운동이 중심이 되었었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대에 꼭 들어맞는 운동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여연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더 뛰어라”

지난 10년을 쉼없이 달려왔지만, 참여연대에게는 오히려 풀어야 할 과제들이 더 산적해 가고 있다. 하지만 창립 당시에 내 걸었던 주요한 의제와 그에 대한 구체적 제도들은 이미 상당 부분 제도화되거나 공론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창립 10돌을 맞은 참여연대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활동의 결과로 인해 새로운 영역과 의제를 발굴해야 하는 역설적인 조건에 놓여 있다.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참여연대가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박변호사는 웃으며 “이제 여러분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제안은 여전히 많다.

“참여연대가 지난 10년 동안 잘 했다라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는 문제가 너무 많은 사회를 갖고 있잖아요. 물론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좀더 각론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해야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국회에 민주노동당이 진출하고, 정당이 조금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시민사회의 선도성이라고나 할까, 개혁의 주도력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박원순 변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의 꿈과 열정을 다시 되새겨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뛰자고 말한다.

“지난 10년, 20년을 돌아보면 한국사회가 크게는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특히 외국 선진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아직 우리가 가야할 길은 참 멀어요. 작은 제도부터 도입해야할 것들도 너무나 많구요. 저는 부패 하나만 하더라도, 이제 제2의 반부패운동이 또 출범을 해야한다고 봐요. 그런 시각으로 보면 참여연대 운동의 성과로 하나하나 작은 아젠다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박변호사는 참여연대가, 그리고 시민운동이 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참여연대를 포함해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돈도 없죠, 사람도 없죠, 다들 작은 기관이고 단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주로 막강한 정부권력이라든가 재벌권력이라든가 이런 쪽이니, 한마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예요. 하지만 다윗이 이겼잖아요. 우리는 명분있죠, 비젼이 있죠, 또 그것을 구체화하는 열정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힘으로 참여연대와 시민운동이 좋은 활동을 해 온 것이라고 봐요.

제가 옛날에 많이 강조했던 것이, “우리는 나비같이 날아서 벌같이 쏜다”는 것이었어요. 너무 큰 대포로 쏘면 이게 조준이 잘 안되잖아요. 그런데 바늘로 가서 꼭 찌르면 바뀐다구요. 아프니까. (웃음) 그래서 굉장히 미시적이지만, 굉장히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그런 운동들이 곳곳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으리라고 봅니다.

정부나 기업도 커져가면 관료화되어 처음의 비전과 본분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시민단체도 그런 우려가 있다고 봅니다. 참여연대도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가졌던 꿈과 열정을 다시 되새겨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현재 상황에 맞는 비전을 다시 세우는 것부터 해야한다고 봅니다. 아까 말한 일인시위니, 소액주주운동이니, 낙선운동이니 하는 정말 기가 막히도록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좋은 운동을 다시 펼쳐야지요. 그래서 다시 10년, 20년이 지난 후에 우리가 열정을 다 바쳐 일했고, 또 그만큼 한국사회가 이만큼 좋아졌다 자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지요.”

최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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