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5월 2007-05-01   4779

길이와 부피를 재고 무게를 다는 도량형의 역사

변 사또가 춘향을 처형하려는 순간, 역졸들은 마패를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각 고을 수령들은 혼비백산 흩어지고 말았고, 변 사또는 암행어사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춘향전에서 가장 통쾌한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이몽룡이 마패 말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던 것이 무엇일까? 바로 유척이다. 암행어사는 각 고을의 도량형과 형구의 규격을 검사하기 위해 2개의 유척을 허리춤에 지니고 다녔다.

왕은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 봉서, 사목, 마패, 유척을 하사했다. 봉서는 암행어사 임명장이고, 사목은 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켜야할 규칙과 임무의 수행목적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글이다. 마패는 30리마다 있는 역에서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증표였다. 마패에 그려져 있는 말의 숫자만큼 말을 바꾸어 주었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를 말한다. 암행어사는 유척을 가지고 다니며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엉터리 도량형을 써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나라에는 정해진 양만 바치고 나머지를 챙기는 부정부패 행위를 단속했다.

우리 몸을 기준으로 만든 도량형 단위

도량형은 길이와 부피를 재고, 무게를 다는 것을 말한다. 도(度)는 물건의 길이를 재는 자를 말하고, 량(量)은 곡식의 부피를 재는 되나 말을 뜻한다. 형(衡)은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옛 사람들은 처음에 한 뼘의 길이, 한 아름의 부피, 한 짐의 무게를 기준으로 서로 물건을 교환했다. 손톱 만하거나 손바닥 만한 넓이, 손가락이나 발가락 만한 굵기, 주먹 만하거나 사람 머리 만한 크기 등의 도량형 단위는 모두 우리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손가락을 잔뜩 벌려 한 뼘을 재는 모습을 본따 ‘자 척(尺)’자를 만들었다. 네 손가락을 가볍게 붙여서 손을 폈을 때의 사이를 1부(扶)라고 했으며, 1부를 4촌(寸)으로 정했다. 또한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폈을 때의 너비를 1척(尺) 또는 지척(指尺) 1자라고 했다. 1척은 10촌의 길이에 해당했다. 더 큰 길이 단위는 걸음으로 재었다. 길을 따라 길이를 재는 걸음은 농지와 집터 등의 넓이를 측정하는 것으로 확장 사용되었다.

세종때 완성된 조선의 도량형

사회가 형성되고 경제가 발달하여 국가가 세워지면서 도량형이 개인이나 지역별로 서로 달라서 상당히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량형의 통일은 국가 형성의 역사이며, 표준제정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으며, 수레바퀴 사이의 길이를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도록 명령했다.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는 법을 만들고, 표준이 되는 도량형 용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전국에 내려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도량형 기준을 만들어 반포했는데, 조선왕조의 도량형은 세종 때 그 기본 틀이 완성되었다. 세종은 우리 고유의 음악을 장려하기 위해 박연에게 명하여 「악학궤범」을 짓게 하였다. 황종은 「악학궤범」에 나오는 12음률 중의 하나이며, 황종관은 우리 음률의 기본음인 황종음을 정하기 위해 만든 관이다. 세종은 황종관을 이용하여 길이와 부피와 무게를 다는 기준을 정하도록 명했다. 우선 길이의 기준을 어떻게 정했는지 알아보자.

박연은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되는 기장 가운데 크기가 중간치인 것을 골라서 100알을 나란히 쌓아 그 길이를 황종척 1척으로 하였다. 기장 1알의 길이를 1푼(分)으로 하고, 10알을 쌓아서 1촌(寸)으로 하고, 100알을 쌓아서 1척으로 하였다. 다음으로 부피의 기준을 어떻게 정했을까? 박연은 기장 1,200알이 들어가는 관의 부피를 1작(勺)으로 하고, 100작을 1되, 1000작을 1말로 정했으며, 15말을 작은 섬, 20말을 큰 섬으로 정했다. 무게의 기준은 어떻게 정했을까? 박연은 기장 1,200알이 들어가는 황종관에 우물물을 가득 채워 그 물의 무게를 88분으로 정했다. 그리고 10리(釐)를 1분, 10분을 1전(錢), 10전을 1량(兩), 16량을 1근(斤)으로 하였다. 이러한 황종척을 기본으로 하여 1430년(세종 12년)에는 주척, 영조척, 예기척이 만들어졌으며, 1431년(세종 13년)에는 포백척이 만들어졌다.

‘평·돈·관’ 등 일본식 도량형 사용의 일상화

주척은 중국의 모든 문물제도가 주나라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유교적 관념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에 들어와 조선초기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에 근거해 주척을 황종척과 비교하면 주척 1척의 길이는 6촌 6리였다. 주척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0.81cm에 해당한다. 주척은 주로 측우기 등 천체기구를 측정하거나, 사대부집 사당의 신주를 만들 때 사용했으며, 도로의 거리 수, 묘지의 영역, 훈련관 교정의 거리 수, 활터의 거리수를 잴 때 사용했다. 그리고 토지를 재거나 시체를 검시할 때도 사용했다.

영조척(대척(大尺) 또는 차공척(車工尺))은 관청 등의 건물을 짓는데 주로 쓰이던 자로 목수들의 필수품이었다. 영조척은 무기를 만들거나 벌을 줄 때 쓰는 형구를 제조할 때 사용했으며,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을 때도 이용했다. 또한 도로, 배, 수레를 만들 때도 쓰였다. 영조척은 구리로 주조하기도 하고 상아로 만들기도 했으며, 직각으로 구부러진 직각자를 많이 사용했다. 영조척 1척의 길이는 황종척으로 8촌 9분 7리였다. 박홍수 교수는 세종 때의 영조척 길이는 31.24cm, 영조 때의 영조척 길이는 31.22cm로 추정했다. 예기척은 종묘나 문묘 등에 제사를 지낼 때 각종 예기 제작에 사용한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태종 때 허조가 제정했으며, 세종 때 주척을 기준으로 개정했다. 예기척 1척의 길이는 황종척으로 8촌 2분 3리였다. 세종 때의 예기척 길이는 28.64cm였다.

포백척은 포목점에서 옷감을 사고팔거나 옷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 주로 쇠로 주조하여 은으로 장식하거나 대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포백척은 지방과 사용자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포백척을 만들어 전국에 나누어주기도 했다. 세종 당시 포백척 1척의 길이는 황종척으로 1척 3촌 4푼 8리였으며, 미터법으로 바꾸어 계산하면 46.73cm에 해당했다.

한편, 이러한 조선의 표준 도량형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겨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에 일본식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1902년(광무 6년) 허울뿐이던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도량형의 검정기관인 평식원을 설치하고 서양의 미터법을 도입하였다. 1903년에는 일본의 영향 아래 척, 되, 말, 저울이 새롭게 제작되었고, 이에 대한 조칙이 반포되었다. 이후 일제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량형의 단위들은 점차 소멸되는 반면에 토지를 측정할 때 ‘평’, 무게를 측정할 때 ‘돈’이나 ‘관’ 같은 일본의 도량형 단위들이 새롭게 사용되었다. 1척의 길이도 일본 곡척의 기준에 맞춰 30.303cm로 바뀌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대한민국은 1959년에 국제 미터협약에 가입했고, 1961년에는 미터법을 발전시킨 국제단위를 법정단위로 정했다. 하지만 일본식 표준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아파트를 거래할 때 ‘평’수에 따라 가격을 매기고, 돌 반지를 선물할 때도 금을 ‘돈’당 얼마씩에 거래한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한 근에 600g, 채소는 400g, 과일은 200g에 구입한다. 과연 이몽룡이 지금 시대에 다시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면, 그의 허리춤에는 어떤 유척이 매달려 있을까?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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