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 한 시민운동가의 고백

1980년을 보낸 한 학생운동가가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었던 좌절감과 그것을 딛고 지금의 시민운동가로 성장하기까지 솔직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1980년, 대학 2학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5월14일 교문을 돌파한 시위대는 신림동 네거리→영등포역전→여의도 노총 회관 앞을 지났다. 그리고 서울대교 앞에 이르자 다시 한번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마포→아현동→신문로까지, 신문로에서 또 다시 저지선에 부딪쳐 법원 앞으로 해서 시청 앞에 집결했다. 교문을 나선 시각이 열두시였는데, 시청역에서 어느 낯선 30대 남자에게 김밥을 얻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니 일곱시를 넘기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자면, 어느 선배가 말하길 최루탄 분무차의 구멍에 소화기를 뿌려대면 그곳이 막힌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 친구와 조를 이뤄 강의실 복도에 있는 소화기를 맡았다. 그런데 막상 최루가스가 뿜어나오기 시작하자(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친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혼자 소화기를 낑낑 메고 가스 속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차의 구멍에 소화기를 갖다 대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잘못 작동해서인지 아니면 작동은 하는데 나오는 바람이 워낙 강해서인지는 몰라도 도통 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비장의 ‘무기’(?)를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낑낑거리고 후퇴해 최루가스가 미치지 않는 수위실 뒤 잔디 위에 고이 내려놓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이미 아수라장이 된 수천명의 투석전에 가담했다.

그런데,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우리가 가진 물리력이 얼마나 허약했나 하는 점을, 또한 학생시위로 정권을 뒤엎은 4·19혁명의 신화는 역시 신화였다는 것을 말이다.

80년5월, 우리는 그때 깨달아야 했다.

5월14일의 시위, 그리고 15일의 서울역 시위 이후 우리는 20일까지 ‘직선제 개헌을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하고 일단 해산했다. 5월16일에는 학생회의 결의대로 휴교중인 학교를 지키기 위해 등교했는데, IMCS관(늘 경찰들이 많이 모여 있어 짭새관으로 불렸다)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의 학생들이 교직원에게 교내에 하나뿐인 수동식 윤전등사기를 돌리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그 교직원은 자신은 조작할 줄 모른다며 시치미를 떼면서 벌어진 실랑이었다. 학생들은 그 등사기만 돌릴 수 있다면 하루에 10만 장의 유인물을 찍어낼 수 있다고 했다. 교직원 설득에 실패한 그들은 일단 기계라도 지키자고 호소하면서 자원자를 모집했다. 나는 잠시 남아 있다가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5월14일의 역사적인 가두시위를 결행하면서 준비한 유인물은 모두 1만 장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러나 가두로 나온 뒤 영등포역전에서 대중집회를 열 때는 시민에게 나눠줄 유인물이 다 떨어지고 하나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에게 플래카드 2개만 앞세운 채 스피커도 없이 오직 맨 목소리로 집회를 가졌다.

그때 우리는 깨달았어야 했다. 교문을 나서서 가두시위를 할 수 있다며, 곧 계엄검열로 보도되지 못하던 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시민들에게 알리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학교 안에서는 최대의 군중이었으나, 가두로 나서자 곧 바다속의 자그마한 섬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가두로 나서면 곧 총칼과 탱크가 우리를 가로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경들은 정해진 작전시간만 버티고는 후퇴해버렸다. 여의도를 향해 전진할 때 스크럼을 짠 내 옆에는 마침 12·12사태를 예언해 일약 유명해진 선배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시위대열에서 껑충껑충 뛰어 앞뒤를 내다보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시위대열에 감탄할 뿐 “나도 모르겠다”라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그가 그 시점에 나와 똑같이 시위대열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나는 거리의 시위대를 믿지 않는다.

그 뒤로 나는 어떤 면에서 거리의 시위대를 믿지 않게 되었다. 서울역에 모인 10만 시위대는 결코 ‘권력’이 아니었다. 아무리 소수의 반동세력이라도 일치단결해 있다면, 물리력을 갖지 못한 시위대란 이빨 없는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권력은 어디에 있는가? 총칼이 아니라면 ‘사무실’에 있다고 생각했다.

망망대해 같은 대중을 조직하지 않고서 혁명은 불가능했다. 그 대중은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가, 지식인 등의 개념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층이었다. 나는 그즈음 ‘대중조직’을 무척이나 강조했으나, 당시 풍미했던 노동현장론 때문에 오히려 운동을 포기하던 많은 후배를 보면서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대학 4학년 때 학생운동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이후 노동현장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거의 이데올로기처럼 받아들여졌다. 나는 노동현장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부문의 가능성과 의미를 지나치게 부정해버리는 이 논리가 학생운동의 양적 확산뿐 아니라, 장차 우리 사회운동의 다양한 발전에도 장애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적성이 맞을 경우 대학원에 가라, 그것도 운동이다.”고 권유한 적이 있다. ‘노동현장’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운동, 사회복지운동, 과학기술운동의 가능성을 추구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스스로도 사회복지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마포에 있는 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서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고, 그곳 상담실에서 일했다.

내가 ‘참여민주주의’란 말을 처음 접한 곳은 한국사회복지협의회였다. 자원봉사자 교육용으로 마련된 얇은 책자에는 그곳 실무자가 직접 번역한 미국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미국의 사례라는 데 경계심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우리 사회에 적용될 분야가 점차 넓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더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는 내 능력 밖이었다. 다만 누군가 같은 생각으로 파고드는 연구자가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나는 참여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참고할 만한 국내 사례로는 정주영 씨가 이끌던 지역사회학교운동협의회, 5공식 히틀러 유겐트란 비판을 받던 한국청소년연맹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민주주의의 주체에 대한 계급적 규정에 치우쳐 있던 당시 운동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요체로서 ‘참여’를 강조한 참여민주주의론에 상당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나는 특히 운동에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 ‘노동현장’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느끼고 이었다. 나는 이들 가운데 일부를 ‘자원봉사자’라는 형태로 각종 사회기관이나 사회복지단체와 연계시키려고 전화번호부와 신문을 뒤져 한국노동연구원, 여성단체협의회, 시흥동의 한 무료도서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등을 쫓아다녔다. 결국 당시 평창동에 있던 기독사회문제연구원 자료실에서 신문스크랩 봉사팀으로 일하게 됐다. 모집도 하지 않았는데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돌아다녔으니 좀 이상한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나는 당시의 활동과 생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앞서지 않았는가 생각해보지만, 당시 변변한 사회단체 하나 없었던 사회운동의 실정에서 대학 4학년생으로 일을 추진하기에 어려웠던 것 같다.

당시 내가 가졌던 희망 가운데 하나는 학교를 졸업하는 수많은 양심적인 학생들이 학생시절부터 학교 밖에서 연계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운동단체가 조금 ‘있었으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많아졌다’. 나는 특히 앞으로 참여연대가 그런 역할을 많이 해주었으면 한다. 한편 당시만 해도 생각이 비슷한 선배들이 좀 있었으면 했는데, 이제 참여연대에는 그런 선배나 어른들이 제법 있는 것 같다.

‘노동현장’이 아닌 사회운동을 선택하며

지금도 서울역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내 눈엔 그 때의 시위대열이 떠오른다. 10만 군중이 모였던 그곳, 그리고 그 이후 자원봉사를 받아줄 단체를 찾아 운동화짝을 들고 터벅이던 대우빌딩 앞길…

그러면서 또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15년 전의 일이 이렇게 선명하고,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리고 15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대학 1학년 때인 1979년에 선배를 따라 4·19탑에 몰래 분향을 하면서도 4·19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6·3사태나 3선개헌은 물론이고, 국민학교 시절 겪었던 유신쿠데타마저 아주 오랜 옛일 같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4·19가 나기 불과 7년 전에야 그 비참한 전쟁이 마무리되었고,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1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1987년 6월 항쟁이 8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힌 사건처럼 되어버린 현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나는 해방 3년간에 대한 연구를 지켜보면서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또 놀란다.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마치 그 기간이 영겁의 시간인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 짧은 시간의 한계 안에서는 모든 조직과 이론이 미처 정리되지 못한 채 사태의 흐름 속에 쓸려 떠내려가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지금도 마치 한국사회가 전혀 과거의 역사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회처럼 이야기하는 걸 본다. 정보화사회, 신세대의 등장 등등. 나도 그런 변화 앞에 앞장서서 적응하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내 스스로가 너무 역사를 머리 속에서 왜곡시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크게 보아 한국사회는 아직 격동을 거듭하는 사회다. 사회기구의 안정성이 강화되어 가는 것이 분명하고, 이른바 시민사회가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것도 분명하지만, 시민사회의 전형처럼 여겨지던 서유럽에서도 1968년 혁명 같은 것이 있었듯이 우리 사회는 아직 격동기의 사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선배들의 언행을 되새겨보면서 그들이 해방정국과 4·19를 겪은 세대였다는 것을 언뜻언뜻 깨우치는 때가 적지 않다.

역사는 앞으로 참여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앞으로는 신사처럼 행동한다고는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것은 환상이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으며 항상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낼 뿐이다. 지금 2000년대를 생각하는 조직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5년 남은 1990년대 후반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5년을 건너뛴 21세기는 환상일 뿐이니까.

박준영(격주간 신문 「아시아 공동체」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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