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5월 1999-05-01   619

학자들의 권력참여는 장식품인가

학자들의 권력참여는 장식품인가

한국에서 지식인의 정권참여는 성공적일 수 없는가.

지난 4월 1일 최장집 교수의 돌연한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직 사퇴는 이같은 질문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번 사건은 김영삼정권 당시 한완상, 김정남 씨 등 ‘개혁적 인사’의 도중하차와의 비교의 도마 위에 올려지고, 지식인의 정권참여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지식인의 정권참여’. 이 표현의 한국적 의미는 매우 특수한 맥락을 갖는다. 김영삼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교수·학자 등 지식인들의 정권참여가 지식인에게 일반적으로 요망되는 현실참여의 한 방편으로 생각될 여지는 별로 없었다. 오랜 독재정권 기간을 경과하면서 지식인의 정권참여란 정통성없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고, 실제로 정부 요직에 등용된 지식인들이 주로 한 역할도 ‘통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보조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80년대 이후의 사정만 돌아보더라도 지식인 정권참여의 어두운 그림자는 짙고도 길다 우선 80년 신군부가 만든 초헌법적·헌법파괴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와 국가보위입법회의(입법회의)에 20여 명의 교수가 참여했다. 김종인(서강대), 한승수(서울대), 김상협(고려대 총장), 나창주(건국대) 교수 등이 그들이며, 그들은 이후 정계와 관계의 요직을 두루 거칠 수 있었다. 그외에 김경원(고려대 교수, 5공 초대 비서실장), 최창규·김학준(서울대 교수, 민정당 의원), 나웅배·배성동(서울대 교수), 함병춘(연세대 교수, 대통령 비서실장), 이영호(이화여대 교수, 체육부 장관), 한승조(고려대 교수), 그리고 이규호, 김영작, 한상일 씨 등이 또한 5공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5공에 이은 6공 노태우정권 때에는 노재봉·이현재·이홍구·정원식·조순 씨가 모두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국무총리나 부총리직에 임명되었다『한겨레신문』 96년 1월 18일자 참조).

그러나 당시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렸을지 모르지만, 당시 민주화를 바라던 시민·학생들에게는 싸늘한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 정권에 참여한 인사가 학교에 돌아오고자 했을 때 학생들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또한 91년 5월투쟁 당시 정원식 총리에 대한 밀가루 세례 사건에서도 역시, 정권에 참여한 학자에 대한 학생들의 시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들의 ‘5·6공 경력’은 화려한 출세의 징표가 아니라, 선거유인물이나 신문지상에 실리는 자신의 프로필에서 지워내버리고 싶은 ‘인생의 흠’ 쯤으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 비록 구여권의 후임 정권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32년만의 민간정부 수립은 지식인의 정권참여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권내 ‘개혁’세력이 헤게모니를 발휘하는 데 제약이 많은 조건에서 재야나 개혁진영에 포진한 지식인·학자들이 비판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정권을 개혁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참여개혁론, 개혁보양론, 도너츠론)가 일정한 세를 얻었다. 그리고 “머리는 빌릴 수 있으나 건강을 빌릴 수 없다”는 지론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많은 학자출신 인사를 중용했다.

그리하여 많은 교수출신의 지식인들이 정권에 참여했다. 박재윤 교수(서울대)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통산부 장관을 지냈고, 박세일·이각범 교수(서울대)는 경실련에서 일하다 청와대 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이수성 서울대 총장이 총리로, 오병문(전남대), 김숙희(이화여대), 박영식(연세대), 이명현(서울대) 교수들이 교육부장관으로, 손학규 교수(서강대)가 여당 대변인·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는 서진영 교수(고려대)가 임명됐다.

무엇보다도 김영삼정권 출범당시 학계 인사 기용이 두드러졌던 부분은 외교-안보팀이었다. 한완상 통일부총리, 한승주 외무부장관, 김덕 안기부장,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이른바 ‘4인방’이 모두 교수 출신이었다. 이들은 정권출범 초기 개혁을 기대하는 진영에게는 대북 온건·화해정책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수구세력으로부터 집요한 이념적 공격의 대상이 됐다. 특히 한완상 부총리의 경우, 오랜 민주화투쟁의 고초를 대통령과 같이 겪은 재야인사이자, 정권의 이데올로그적 역할을 담당한, ‘참여개혁론’의 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결국 한완상 부총리와(담당한 분야는 다르지만) 김정남 교육문화수석은, 조선일보사의 ‘색깔론’ 시비 이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한완상 부총리로 대변되던 나름의 대북정책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갈팡질팡 혼선양상으로 나아갔다. 그 뿐만 아니라 정권 전체의 성격이 모호해지고 말았다.

YS정권하 ‘참여개혁론’이 남긴 의미

이같은 사태전개는 예전 독재정권 시절처럼 지식인의 정권참여를 이분법적으로 볼 수는 없으나, ‘개혁적 지식인’의 수혈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이끌어내기에는 매우 많은 현실적 어려움이 존재함을 일깨워주었다. 정권은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견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당장 보수기득권층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정권활용론’을 내세웠으나 누가 누구를 ‘활용’했는지 모르게 돼버렸다. 그들은 정권 핵심부와의 연계는 있었으나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고, 또 공무원사회를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검증되지 못한 재야출신” “구호외치기와 국정운영은 다르다”는 등 보수언론의 공격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념적 공격의 근거가 된 우리 사회의 ‘레드컴플렉스’와 그것을 적극 ‘활용’한 조선일보사 등의 수구언론도 또한 그 걸림돌로 지적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정권. 이 정권은 50년만의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김영삼정권과 분명한 차별성을 가지고 출범하였다. 백낙청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활동해온 지식인들이 김대중정권을 바라보는 인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내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도 처음…(정권교체의 의미, 대북문제의 능력, 지역화합 가능성 등의 이유로) 획기적인 세대교체, 또는 세력교체를 이룰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정권교체나마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창작과비평』 98년 봄호 대담). 즉 이제까지 역대 정권 중 ‘개혁적 지식인’으로부터, 상대적이지만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정권으로서 출발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야당총재시절부터 김대중 대통령은 학계에서도 많은 지지세력·자문교수를 두고 있기도 했다.

또한 정권교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김영삼정권이 초기에 처했던 상황을 김대중정권은 많은 부분 공유하고 있다. 1인에 의존하는 정치구조와 관행, 공동정부 내부의 취약한 개혁기반, 수구기득권층의 개혁 사보타주·개혁세력 포위 등등. 말하자면 ‘개혁지식인의 호감+정권의 어려운 처지’의 결합으로 인해 정권으로부터의 흡인력은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듯 정권의 핵심 공직에 직접 학자들이 임명된 경우는 별로 없으며(각료 중에는 김성훈 농림부 장관이 유일. 그외에 김유배 청와대 수석, 나종일 국가정보원 차장 등이 교수 출신), 반면 제2건국위원회, 민화협,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등 외곽조직 또는 관민합동기구에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번에 경질된 최장집 전 위원장의 경우 위원회가 큰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김영삼정권 당시 한완상 부총리처럼 상징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낡은 이념적 시비가 직간접적인 계기가 됐고, 보수세력의 눈치보기용, 총선대비용 등의 분석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김영삼정권의 재판(再版)’을 떠올리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 상황 판단은 이를 수 있다. 정권참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본다면, 현재의 정권에서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 하나(예컨대 신자유주의 반대론)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권 외부·시민사회에서의 대중적 압박이 사회개혁에 더 주효할 수 있다고 보거나 또는 이를테면 서구에서 얘기되는 ‘지식인’(『프랑스지식인사전』에는 ‘지식인’을 정치적 경력을 선택하지 않은 참여,‘앙가주망’을 실천한 사람으로 정의내리고 있다)처럼 다른 방식의 참여에 더 가치를 두는 입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은 성공할 수 있는가.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국장은 “이것(최 교수 경질)을 계기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가 물러나는 학계 인사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따라야 할 것(『한겨레신문』 99년 4월 3일자)”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수강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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