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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호 05월
  • 1995.05.01
  • 435
박은정의 법 이야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 개명 천지에 살면서 일찍이 유길준도 써먹은 이 말에 새삼 감명할 사람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아직도 이 말이 예외로 여겨지는 곳이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법원이나 병원 근처가 그런 곳이다.

명상(名相)이 못될 바에야 명의(名醫)가 되라는 동양의 옛말도 있고, 서양에서도 예컨대 플라톤이 진작부터 사회의 병을 고치는 올바른 정치술을 사람의 신체의 병을 고치는 의사에 비교하여 논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사회적 역할은 어떻든 자주 그 부정적인 모습으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남긴다.

오진으로(사망하여 땅에 묻히니) 지하 6척이요, 오판으로(사형 당해 줄에 매달리니) 지상 6척이라는 말도 있다던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 어느 노의사에 의하면, 오판과 오진의 신기한 차이는 오진을 내린 사람은 때로 그 전문직을 잃고 감옥에까지도 가는데 비해 오판을 내린 사람은 별 뒤탈이 없더라는 거였다.

사법 100주년을 기념하게 되는 올해 벽두부터 사법 개혁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지난 100년은 한마디로 법치주의의 시련과 파행의 연속으로 이어졌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러므로 사법 100주년은 축제로 들떠 맞을 해가 아니라, 진정 반성으로 맞아야 할 해인 것이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치고 법을 잘 지키는 나라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1895년 법의 근대화 계기가 일제의 이민족 통치 수단으로 잠식되고, 그후 정통성이 모자라는 정치권력 유지 수단에서, 자본 독점적 경제 성장 수단으로 오늘에 이르러, 권력과 재력에는 약하고, 국민에게는 군림하는 사법상이 1995년 오늘의 그 모습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법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덜된 부분에 속한다. 만약 광복 50년에 이르는 그 저간에 사회의 다른 부분들에서 기본틀과 그 종사자들의 의식이 변해간 만큼, 사법도 그때그때 조금씩 자기모습을 바꾸었다면, 누구 말대로 오늘 이렇듯 ‘혁명의 상황’을 맞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주체인 사법이 오히려 사회에 부담을 안기다 못해 국민들에게 사회악의 한 온상으로까지 비치게 된 지금의 상황은 법률가들을 불행하게 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국민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홍구 국무총리의 지적도 있었듯이 정부에 접수되는 민원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의 하나가 법률써비스 개선 부분이라 한다면, 오늘의 이 국민적 사법 개혁의 욕구는 이미 사법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에 대한 기대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 문제가 너무나도 중요한 까닭에 교육자들에게만 맡겨 둘 수 없는 문제가 되었듯이 말이다.

문민정부 출범시 대법원이 주관한 사법제도 개선위원회가 사법부 중심의 편의와 합리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개선’을 이루었다면, 이제야말로 명실공히 국민의 편의, 국민의 권익을 위한 사법개혁이 대세가 된 시점이다.

법조인의 선발과 양성문제, 이른바 전관 예우 작태의 근절, 법원의 권위주의 극복을 통한 양질의 재판을 받을 권리 확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변호사 수임료를 위시한 인지대, 감정료 등 각종 소송비용의 적정화, 국선변호인제도 개선 및 법률구조 확대 등을 통한 국민 생활과 조화되는 사법의 관철, 구속 수사의 남용에 따른 제반 처우 문제와 국제 규약 수준에 합치되는 행형의 확립, 시민 참여라는 말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사법 구조, 법률 시장의 개방화, 세계화와 남북통일에 대비하는 사법체계 수립 등등. 이 모든 과제들을 앞에 두고 중지를 모으고자 애쓰는 일이 자칫 이해 집단간의 세력 조정의 차원으로 변질되거나, 무슨 깜짝쇼니 하는 정치적 후각으로 접근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또 기득권에 밀려 어정쩡한 차선책들만 주워 모아 개혁이랍시고 포장해 내도 안될 것이다.

이렇게 정신차리기 힘들 정도로 주변이 급변하는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 인간사회 문제의 근본에로 돌아가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이야말로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다. 산적한 사법 개혁의 과제를 두고 우리는 설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오늘은 한 그루 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돌아가야 할 줄 안다. 기득권이 어떻고 하는 소리 듣기를 못마땅해하기 이전에 나를 포함하여 - 나 또한 원만한 사립대학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는 중견 교수인 고로 - 법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에 직업적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처절한 반성의 자세로 토론에 임한다면, 우리는 난마처럼 얽혀 우리의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사법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중구난방으로 보이는 이런저런 안(案)들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공통분모를 만들어 나가는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법개혁의 논의 주체나 논의 방식을 둘러싼 긴장과 혼란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사안의 본말을 전도시킬 만큼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제도 개혁에는 누군가 손해를 보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을 일시에 만족시키는 안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는 꼼짝없이 그 자리에 주저않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공익의 관점에서 손해를 보는 쪽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법 개혁은 청와대가 하는 것도, 사법부가 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개혁은 민주 시민의 분별력으로 자신의 눈 앞의 손해를 더 큰 연대 속의 손익 계산서에 대입시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이로운 것으로 환산해 낼 줄 아는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것이다.
박은정(이화여대 법학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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