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문화 없는 시민사회

시민문화 없는 시민사회

민주주의 완성은 민주적 시민사회의 정착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바람직한 시민문화 형성을 위한 방안들을 모색해본다.

한 사회 내의 이해관계가 다원화되어 있고 이 다원적인 이해관계들을 조정할 제도와 절차가 필요한 것이라면, 형식적 평등원리에 기반한 정치·시민적 권리들과 게임규칙 및 절차들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는 이러한 절차의 제도화뿐만 아니라 제도의 실제적인 운용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또한 중요하다.

시민문화는 시민사회의 핵심 요소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더디게 정착되는 것에는 제도자체에 결함이 있다기보다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파행적인 법 집행과 운용에도 큰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형평성과 공정성에 입각한 법 집행은 물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결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제도화를 위한 조건의 하나로 최근 시민사회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 서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적 수준과 시민사회적 수준에서의 이중적인 전략으로 특징지어진다. 곧, 시민사회 내의 제도와 습속은 권력의 집중화를 견제하고, 시민들의 공공정신을 발양하며, 사적 이익의 추구를 완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바, 시민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제도적 차원과 동전의 양면을 구성하는 이런 시민사회의 민주화는 여론형성을 통해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한편 국가정책에 압력을 행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가 곧 시민문화다. 시민사회의 의식적인 기반과 보루로서 이 시민문화는 민주주의를 위한 윤리, 도덕, 가치규범의 내면화를 의미하고, 따라서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적 절차와 참여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민주주의적 실천은 제도의 완성으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가치와 규범, 사적 이기주의를 넘어선 공공정신, 질서의식 및 준법정신,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능동적 참여의식, 토론과 설득을 통한 합의 창출방법 등이 사회화될 때 지속가능한 것이다.

서구의 제3세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몇몇 국가들에서 형식적 절차의 도입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성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독재체제로 후퇴하였던 것도 다름 아닌 이런 민주적 시민문화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시민문화가 시민사회 내에 견고하게 뿌리박을 때 시민사회는 비로서 비판적인 담론형성 및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시민문화의 형성과 특수성

시민사회의 등장이 봉건적인 사회제도 및 의식을 대신하여 근대적인 사회제도, 의식구조, 생활양식이 공간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한국에서 시민사회가 성립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20세기 전후라고 볼 수 잇다. 이 시기에 한국은 사회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었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외세에 의해 파행적으로 성립되었으며, 과도기적 정치상황에서 국가권력은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과도하게 성장하였다.

국가의 과잉발전에 따른 시민사회의 저발전은 1945년 해방 이후 분단구조의 정착과 한국전쟁, 군부 쿠데타와 장기간 군사독재로 지속되었으며, ’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공간이 어느 정도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시민사회 형성은 처음부터 파행적인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자율성의 많은 부분이 국가에 종속되었고,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이 지연되었다.

한국 시민사회의 이러한 특수성은 특히 사회문화적인 의식과 생활양식의 측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가족주의 대 개인주의, 권위주의 대 자유민주주의, 연고주의 대 경쟁주의, 반공주의 대 민중주의 등이 시민사회의 경쟁적이고 갈등적인 의식 및 생활양식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중 가족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가 전통적인 유교윤리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라면, 자본주의적 생산 및 계급관계의 발달에 상응하는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 경쟁주의는 외부로부터 도입된 정치제도 및 이념이 교육, 언론 등을 통해 시민사회의 의식형성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등장한 것이다. 한편 반공주의와 민중주의는 한국 정치상황의 특수성으로부터 유래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식형태와 이데올로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위치가 서로 다른 시민들과 집단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시민사회 내의 갈등구조를 다층적으로 만들어 왔다. 여기서 한국 시민사회의 규범적 조직원리로서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는 시민사회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및 경제사회의 차원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또한 귄위주의적 국가의 지배이념 및 통제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전통적인 가치 및 신념체계들은 외부로부터 도입된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 경쟁주의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민주화를 지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물론 가족주의적, 연고주의적 인간관계가 합리성, 계산성, 효율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민사회의 비인간화를 제어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권위주의하에서 관찰되는 상위자의 권위는 하위자에 대한 보호라는 측면 또한 갖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엄격히 볼 때 이 가족주의와 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개인의 자율성 및 책임성의 원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바람직한 시민문화 형성 전략

그렇다면 보다 바람직한 시민문화의 형성을 위해서는 어떤 방안들이 모색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략들과 조건들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첫째, 민주적인 시민윤리 및 도덕의 내면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개혁이 중요하다. 교육이 민주적인 태도와 가치를 형성시키는 기초라고 할 때, 학교교육은 이러한 민주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이다.

인간의 존엄성, 공공질서 덕목, 합리적 의사결정, 사회 참여와 비판, 공동체에 대한 협동과 연대의식은 바로 이 학교교육을 통해 내면화될 수 있으며, 따라서 교육은 올바른 시민문화를 달성할 수 있는 일차적인 통로다. 특히 타인의 견해에 대한 관용과 타협을 승인하는 도덕교육과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자발적인 참여의식을 함양하는 정치교육은 가치체계의 민주화와 사회제도의 민주화를 연결하는 매개영역인 것이다.

둘째, 언론 민주화는 시민문화를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언론의 보도와 논평이 편파적이고 불공정하게 이루어질 때 비판적인 공공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구 시민사회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신문 및 각종 대중매체로 구성되는 정치적 공공영역은 국가에 대항하는 여론정치의 주체이자 국가와 사회집단의 강등이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되는 장인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공공영역의 활성화가 강압적인 국가정책 및 언론기관의 사적 이익추구에 의해 제한받게 될 때 국민들의 개방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의 통로는 봉쇄되고 언론은 오히려 민주화의 장애요인이 된다. 공공영역에서 공정한 언론을 통해 여론이 결집되고 이 여론을 매개로 국가와 시민사회가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민주주의는 보다 확장·심화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미주적 시민윤리의 형성은 시민문화의 형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과 대단히 밀접히 관련되어 진행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민윤리의 확립은 시민들이 개인적 집단적 활동을 통해 공적인 일의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충족될 때 보다 원활히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시민들이 정당 및 정치단체에 관여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참여의 절차와 통로가 충분히 개방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주거지역 단위나 직장과 작업장 단위에서의 실질적 참여 기회는 더욱 봉쇄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행정부에 필적할 수 있는 의회의 권한 강화, 정당 내의 권위주의 불식과 민주적 관행의 강화, 이익집단들의 조직화 및 활성화 등의 제도적 조건들이 주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문화의 민주화와 의식개혁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민주적 시민문화 정착이 곧 민주주의 완성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건전한 민주적 시민의식의 활성화는 시민사회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달성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민운동들은 정책결정과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 규범,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민주적 의식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90년대 초반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택, 범죄, 공해, 교육, 물가, 교통, 청소년 문제이며, 현재 이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다양한 환경, 여성, 지역운동 사례들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이 시민운동들은 냉소주의, 무기력증, 비판정신의 부재, 이기주의, 가족중심주의, 무엇보다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있는 일반 시민들을 공적 토론과 행동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의 완성은 그 형식적 절차가 주어지는 것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시민문화의 정착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이며, 본지 편집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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