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10월 2018-10-02   706

[특집] 새로운 전쟁 앞에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특집4_군대 없는 나라, 군기 없는 사회

새로운 전쟁 앞에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글. 백승덕 징병문제 연구자

 

 

한반도에 가을이 왔다. 올봄엔 남북정상이 판문점 도보다리를 걷더니 가을엔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국제정치는 복잡해서 이번 겨울엔 또 어떨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남북정상의 관계만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인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전면전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 년 사이에 남북정상이 주고받는 말은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인터넷에선 남북이 통일되면 군대 안 가도 되냐는 말이 한참 전부터 떠돌기 시작했다. 통일이 되면 개마고원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누군가 던진 농담은 유행하는 ‘짤방’이 됐다. 누군가는 통일된 조국에선 군대에 갈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군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가 해소된다면 시민의 역할이 그 이전과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냉전의 안보분업구조와 용병 역할

냉전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었던 ‘분단’은 무엇이었을까? 냉전기간 유럽과 같은 중심부의 시민들에겐 군사적 충돌이 오직 관념 속에 존재했지만 주변부 국가의 시민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중심부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는 한반도에서 터졌던 전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중심부에서 조용하게 전개되었던 냉전은 주변부로 퍼져나가다가 한반도라는 약한 고리를 가로질러 터져버린 것이다. 그것이 분단이었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용병 역할을 자처하는 생존전략을 취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기회만 있으면 한국군을 백만 명 규모로 증강하겠다고 목소리 높인 이유도 거기 있었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은 한국전쟁 직후에 상호방위조약을 맺으며 <한미합의의사록>의 부록에 한국군의 규모를 72만 명으로 명시했다. 왜 하필 72만 명이었을까? 이승만 정부에게 72만 명이란 규모는 군사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다만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더 많이 받기 위해 병력을 최대한으로 운영할 수 있는 규모가 72만 명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이승만 정부는 72만 명이란 숫자가 어떻게 산출됐는지 묻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병력을 줄이면 줄인 만큼 원조도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 72만의 병력문제는 거론하지 않았으면 바란다.”

1957년 당시 국방장관 김정열의 말 

72만 명이라는 규모는 미국과 한국 정부 간의 타협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은 달러와 원화를 환전하는 식으로 한국군의 병력규모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을 운용하는 비용이 미군에 비해 1/8 정도로 싸다고 봤고, 미군 2개 사단을 전선에서 철수시키려면 한국군 6개 사단, 미군 1개 사단을 철수시키려면 한국군 4개 사단이 새로 필요하다는 계산도 세웠다. 미국 정부는 자국 군인들의 희생에 부담을 느껴 그들을 한국 군인들로 대체하길 원했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군사원조를 더 많이 받는 것이 목표였으니 합의도 적당히 이뤄질 수 있었다.

 

사회학자 정영신은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이 각기 전후방으로 나뉘어 군사적·경제적 역할을 맡았던 것을 ‘동아시아 안보분업구조’라고 불렀다. 하지만 안보분업구조의 범위는 동아시아가 아니라 지구의 절반에 가까운 세계였다. 세계적인 안보분업구조에 의해 전방은 언제나 전시태세를 요구받게 된 반면 후방은 상대적인 안정을 얻었다. 

 

그런데 이 같은 안보분업구조는 탱크와 보병 중심으로 치러지던 당대의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다. 일례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무서운 속도로 내려왔다고 하지만 서울까지 사흘이 걸렸다. 낙동강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대포의 사정거리는 매우 짧았기 때문에 폭격이 아니라면 후방은 안전했다. 그래서 최후방 부산에서는 국회도 열렸고 선거도 치룰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전쟁 와중에 전후방 분위기가 이처럼 달랐으니 세계적인 중심부와 주변부 간에 차이는 오죽 컸을까.

 

그런데 오늘날 전쟁 양상은 완전히 변하고 있다. 냉전 기간 동안 후방의 평화를 누려왔던 유럽에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까닭도 전쟁 양상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쟁의 양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탈냉전 이후의 전쟁 양상 자체가 테러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폭력이 어디에나 퍼져 있고, 주로 민간인이 대상이 되며, 공식적인 전쟁과 비공식적인 범죄가 구별되지 않고, 종교나 종족 등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을 두거나 그러한 정치를 조장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전쟁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새로운 얼굴

특히 정보통신기술은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토마스 하메스 같은 군사학자는 4세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적국의 전쟁정책 자체를 흔들 수 있을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지적한다. 알카에다나 IS 등이 포로를 끔찍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하거나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야간 폭격 장면을 생중계했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등이 4세대 전쟁의 특징이다. 유럽에서 젊은 이주자들이 ‘외로운 늑대’형 테러리스트가 되곤 할 때도 정보통신기술의 영향이나 ‘충격과 공포’ 전략과 같은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가 해소된다는 말은 곧 전통적인 전쟁의 위협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전쟁의 양상은 국가 간에 정규군이 대칭적인 전력에 기초해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직후에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이러한 전쟁이 ‘전체 국가 기구와 사령부가 무기를 들어도 좋다고 인정한 나이의 남성 전체를 상대로 이루어진다’고 비판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는 주로 남성시민들이 전통적인 전쟁에 대처하는 평화주의적 실천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가 해소된대도 전쟁은 양상을 달리해서 새로운 얼굴로 찾아올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성, 동성애자, 난민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혐오는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등을 교차하면서 강화되고 있다. 남북 간에 교류가 자유로워진다면 국가 차원의 군사적 대치는 완화될 수 있겠지만 계급적 문화적 갈등이 일상 속에서 벌어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예를 들어 북한의 건설업 관련 일자리를 두고 북한 거주 노동자와 남한에서 올라간 노동자와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경쟁하는 일들이 잦아진다면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남한에서는 지금도 ‘외로운 늑대’형 범죄가 일상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복잡해진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분노는 전시와 평시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일상의 갈등을 고조시킬 수 있다. 

 

갈등이 일상화될 때 국가는 시민들이 권리를 기한 없이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유행처럼 제정했던 애국자법과 테러방지법은 이런 점에서 오래된 미래다. 일상이 언제나 전시태세로 뒤바뀔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전쟁의 새로운 양상이다. 오늘날 시민은 이러한 전쟁에 대처해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  

월간 참여사회 2018년 10월호 (통권 259호)

 

 

 

특집. 군대 없는 나라, 군기 없는 사회 2018년 10월호 월간참여사회 

1. 군대 없는 안보를 상상한다 

2. 대체복무제에 대한 고찰 

3. 눈물겨운 ‘진짜 사나이’의 재림 

4. 새로운 전쟁 앞에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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