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11월 2018-11-01   1731

[환경] 자연에게 권리를 허하라

자연에게
권리를 허하라

 

동물, 강, 숲 등은 법적인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걸까?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자는 주장은 한낱 몽상이자 헛소리일 뿐일까?

 

지난 2003년 10월 우리나라에서 색다른 소송 사건이 벌어졌다. 경남 천성산에서 살아가는 꼬리치레도롱뇽들이 이 산을 꿰뚫고 지나가는 경부 고속철도 건설 공사를 중단하라는 소송을 법원에 낸 것이다. 물론 도롱뇽이 이런 일을 스스로 할 순 없으니 ‘도롱뇽의친구들’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 대신 나서서 한 일이었다. 그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98년에 낙동강 재두루미를 원고로 한 소송이, 2000년에는 새만금 개발 사업을 막으려고 어린이들이 원고로 나선 이른바 ‘미래세대 소송’이 벌어진 적이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세 경우 모두 ‘원고 부적격’ 판결이 나고 말았다. 동물이나 어린이는 소송을 제기할 법적 자격 자체가 없다고 판결했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싸울 자격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으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진 셈이다. 이런 현실은 여태껏 별다른 변함이 없다.

 

월간 참여사회 2018년 11월호 (통권 260호) 

월간 참여사회 2018년 11월호 (통권 260호)

2003년 10월 지율 스님을 비롯한 ‘도롱뇽의 친구들’은 경남 양산 천성산에 서식하는 꼬리치레도롱뇽을 대신하여 고속철도 공사착공금지 소송을 낸 바 있다. 사진은 꼬리치레도롱뇽(위)과 당시 도롱뇽소송단 100만 명 모집을 위한 활동(아래) 모습. 

출처 환경운동연합 

 

 

앞서가는 외국 사례들을 보라

외국은 다르다. 예컨대 에콰도르는 지난 2008년 8월 자연의 생물이 영구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고 진화할 권리를 가진다고 못 박은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천명하기로는 역사상 최초다. 이 새로운 헌법 조항은 실제 효력은 별로 없는 상징적 선언에 그치는 게 아니다. 국가에 생태계 파괴나 생물 멸종을 일으킬 수 있는 행위들을 예방하고 제한해야 한다는 의무를 공식적으로 부여했을 뿐 아니라, 국가가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일반 시민이 자연을 대신해 법적인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남미에 속한 볼리비아에서는 2011년, 자연을 법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어머니 지구법’을 새롭게 제정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생태주의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재구성한 내용으로 유명한 이 법은 자연의 권리를 11개 항목으로 규정한다. 존재하고 생존할 권리, 인간의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진화하고 생명 순환을 지속할 권리, 평형을 유지할 권리, 오염되지 않을 권리, 유전자나 세포가 조작되지 않을 권리, 지역 공동체와 생태계 균형을 해치는 개발 계획이나 거대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영향받지 않을 권리 등이 대표적이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를 비롯한 이 지역 사람들은 웅대한 안데스산맥을 끼고 살아간다. 이들은 파차마마(Pachamama), 어머니 지구 또는 대지의 신가 모든 삶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구성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추구하는 삶은 부엔 비비르(Buen Vivir)다. ‘참된 삶’이나 ‘좋은 삶’ 정도로 번역되는 이 지역 말로 자연과의 조화, 공동체적 관계, 내적인 평화 등을 중시하는 삶을 일컫는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 지역에서 때때로 주목할 만한 생태적 성취가 나오는 배경에는 이런 삶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이 깔려 있다.

 

이번엔 뉴질랜드로 가보자. 여기선 지난해 3월, 강이 법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위상을 갖는 법이 통과됐다. 이 또한 세계 최초다. 이곳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북섬에 있는 왕거누이 강을 신성시한다. 이들은 약 150년 동안이나 이 강과 얽혀 있는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려고 줄기차게 투쟁해왔다. 자신들이 이 강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해달라는 게 핵심 요구사항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로 긴 이 강은 이제 권리, 의무, 책임 등 여러 측면에서 인간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됐다. 마오리족 공동체가 임명한 대표자 한 명과 정부가 임명한 대리인 한 명이 공동으로 강을 대리하는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고 한다. 마오리족 대변인에 따르면 이로써 “왕거누이 강은 우리와 분리될 수 없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북섬 복판에 있는 산들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을 포용하는 것으로 항상 믿어온” 마오리족의 삶과 전통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지역들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심심찮게 발견된다. 독일은 2002년 헌법에 ‘동물 보호’를 국가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더 일찍이 스위스는 1992년에 ‘동물의 존엄성’을 헌법에 명시했다. 일본, 필리핀,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는 다양한 동물과 어린이, 청소년 등이 주체가 되어 환경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사례가 적지 않다. 대개 동물의 생존과 환경보전을 위해 무분별한 개발 사업이나 벌목을 중단하라는 게 판결 내용이었다.  

 

‘녹색 헌법’은 시대의 요청이다

다시 우리나라로 눈길을 돌리면 마음이 갑갑해진다. 우리나라 헌법은, 또 법률은 아직도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녹색’의 관점에서 볼 때 내용 자체가 턱없이 수준 미달인 데다, 그나마 있는 환경 관련 조항들마저도 무시되거나 경시되기 일쑤다. 한때 개헌 논의가 활발하더니 언젠가부터 흐지부지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의 권리, 모든 생명체에 대한 국가의 보호 의무, 생태계와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 지속가능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녹색 국가의 운영 원리 등을 헌법에 담을 순 없을까? 

 

법이 구현하고자 하는 궁극적 가치인 인간 존엄은 자연의 권리를 인정할 때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생명세계의 그물망을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도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운명이다. 헌법은 한 나라의 근본법이자 최고의 사회 규범이다. 헌법에 생태적 지향을 아로새기는 것은 시대의 요청이다. ‘녹색 헌법’을 둘러싼 보다 광범하고도 전향적인 사회적 공론화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글. 장성익 환경저술가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지금은 독립적인 전업 저술가로 일한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출판 기획,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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