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 2020-10-05   490

[보자] 영화에서는 당신이 나를 ‘팔로우’ 해야 한다

영화에서는 당신이 나를
‘팔로우’ 해야 한다

 

이 시국에 취미생활?

9월 초, 정은경 질병관리청 청장은 ‘심리 방역’을 강조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 절망, 분노 등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방역 차원에서도 문제다. 사회구성원의 정신건강이 악화되면 ‘마스크 써서 뭐 하나’, ‘될 대로 돼라’ 식의 자포자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염병 전문가들은 앞으로 최소 1~2년은 코로나19 대유행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더 이상 ‘이 시국’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거나 미룰 수는 없다. 우리는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야 한다.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삶을. KU마음건강연구소가 개발한 정신건강 자가진단 시스템에는 ‘지난 1주일간 충분한 신체활동을 했는가’, ‘지난 1주일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보냈는가’와 같은 문항이 포함돼있는데, 무엇이 정신건강에 도움 되는지 방증하는 대목이라고 본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양호하다. 활력을 주는 취미생활 덕분일까? 그중 하나가 탱고다. 시작은 친구 따라 수업 들은 것이었는데, 친구 녀석은 그만두고 나만 계속 나가고 있다. 정해진 안무를 추기보다 그때그때 파트너와 교감하며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재밌다. 운동 효과도 있다. 바른 자세에 집중하여 추면 배와 등에 근육이 생긴다! 그리고 내 몸을 좀 더 잘 쓰게 됐다. 탱고를 배우며 새삼 놀랐다. 내가 이렇게 잘 걷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나?

 

당연히 항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틈틈이 손 씻으며 춤춘다. 코로나 시국 덕에 다들 마스크 쓰고 춤추는 게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사진이나 영상 찍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어쩌다 카메라의 프레임에 들어가도 마스크가 나를 가려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안심된다. 

 

탱고에서의 성역할

재미 좋고 몸에 좋은 탱고지만 이따금 반발심이 든다. 앞서 말했듯 탱고는 함께 추는 사람과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고 답하며 함께 음악을 표현하는 춤이다. 그런데 이때 신호를 주는 사람(리더)은 대부분 남자, 신호를 받는 사람(팔로워)은 대부분 여자이다. 수업에서 강사가 하는 말도 굉장히 성별 이분법적이다. 탱고를 배우는 곳에서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저떻고 하는 화법은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팔로워에게는 동작의 자유가 제한돼 있다. 이 음악에는 이런 동작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도, 그 동작이 리더가 던진 선택지 내에 속하지 않으면 표현해낼 수 없다. 그래서 나도 리드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고, 살포시 시도해보았다. 확실히, 리드가 더 어려웠다. 춤을 즐기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리더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진입장벽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훌쩍 넘고 나면 굉장히 많은 권한과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 또한 나는 안다.

 

성별에 따라 역할이 고정되는 탱고의 구조를 해체하고 싶다. 성별과 상관없이 둘 중 음악을 더 잘 이해하고 동작의 신호를 더 매끄럽고 적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리드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리더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문제는 여성이 마음 편히 리드를 배우고 숙련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보편적인 스튜디오에서는 애써 기회를 만들어야 눈치 보며 배울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창작으로 풀어내는 것은 어떨까? 이미 결이 닮은 고민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있다(이제야 이 지면에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97년 만들어진 영화 <탱고레슨>이다. <탱고 레슨>은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감독이 직접 자신의 이름 그대로 출연한 영화다. 다른 등장인물 역시 실제 이름과 직업을 영화에 옮겼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리하는 재미를 관객에게 주고 싶었던 걸까.

 

영화의 무대는 파리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런던을 넘나든다. 파리의 극장, 탱고 공연을 보고 매료된 샐리는 공연이 끝난 뒤 남성 댄서에게 찬사를 건넨다.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탱고 레슨’을 진행하기로 한다. 레슨이 진행될 때마다 샐리의 춤 실력도, 샐리와 파블로의 관계도 달라진다. 관계의 성질도, 역학관계도. 어떨 때는 연인 같이 다정하다가, 뚜렷한 이유 없이 차갑게 멀어지기도 하고, 무대에서는 혹독하고 이기적인 파블로 때문에 샐리는 혼란스럽다.

 

그러던 중 샐리는 대자본의 투자를 받기 위해 작업하던 시나리오를 접고, 탱고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적은 자본으로, 탱고처럼 자유롭게. 그리고 영화배우가 꿈이었다던 파블로에게 감독으로서 출연을 제의한다. “영화에서는 당신이 나를 ‘팔로우’해야 한다”는 선포와 함께. 들라크루아의 그림 <천사와 싸우는 야곱Jacob luttant avec l’Ange>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 장면은 영화 포스터에도 담겨있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호 (통권 279호)

탱고 레슨 The Tango Lesson

드라마·로맨스 | 104분 | 1997 | 15세 관람가

감독      샐리 포터

출연      샐리 포터, 파블로 베론

 

<탱고레슨> 상영회에 초대할 수 있기를

음악 좋고, 촬영 좋고, 탱고 보는 즐거움이 큰 영화다. 특히 요요마Yo-Yo Ma❶가 참여한 <리베르 탱고Libertango>를 배경으로 세 명의 남자와 하나의 여자가 한데 엉켰다 풀어짐을 반복하며 질주하듯 추는 탱고 시퀀스는 압권이다. 탱고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얘기 나누고 싶었다.

 

올해 경기도의 한 문학관과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 관련 이야기를 시민들과 나누기로 약정했었다. 공공시설 운영이 강제 중단되며 상영회가 거듭 미뤄지더니, 결국 8월 말, 아예 취소됐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당시 상영회 프로그램 중에는 <탱고레슨>도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이 영화를 무료로 볼 기회였는데…. 내년에는 상영회를 할 수 있길 바란다. 코로나 시대에도 문화생활은 필요하다. 어쩌면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❶  프랑스에서 태어난 타이완계 미국인 첼리스트


글. 최서윤 작가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데 휴간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최근 활동은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한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창작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종종 칼럼이나 리뷰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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