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4월 2009-04-01   1175

헌법새로읽기_법원 ‘안’으로부터의 독립




법원 ‘안’으로부터의 독립



관료주의, 자기 안의 검열까지 넘어서는 법관의 독립


김진 변호사dzink


서초동 근처가 시끄러운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싸움을 전제로, 싸움을 해결하는 것을 그 존재 근거로 삼는 법원과 검찰청 근처에서 싸우는 사람들, 서로의 멱살을 잡으며 욕하는 것을 보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시끄러움은 법원 안에서 생겨나 밖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이전의 소란과는 다른 느낌이다. 바로 대법관이 법원장 시절 소속 판사들에게 보냈다는 이메일을 둘러싼 소란 말이다.

‘몰아주기 배당과 재판개입 이메일’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나는 감히, 중학교 사회 시간부터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는 절대 실감할 수 없었던, 저어기 뜬 구름 위 명제 “사법권의 독립”이 드디어 속세로 내려와, 비로소 피와 살 그리고 땀 냄새를 갖게 된 중요한 계기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물론 그동안도 몇 차례 사법파동이라고 하여 판사들이 법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과 같이 국민들에게 와닿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활자화되어 TV 화면에 나온 법원장의 이메일은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그걸 본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런 메일을 보냈을까?”, “원래 배당은 어떻게 하는 것인데?”, “사법행정은 뭐고, 재판 개입은 또 뭐야?”, “판사에 대한 인사고과도 하는 거야?” 등등 전에 없이 우리 법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헌법에 명시된 사법권의 독립이란…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사법권의 독립’에 관해서 헌법은 제5장 ‘법원’ 편에서 제법 상세하게 정하고 있다. 이 장에는 모두 10개의 조문이 있는데, 그 첫 문장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는 말이다. 문장은 간결할수록 태클걸기가 힘든 법이어서, 이 문장 어디에도 ‘부장판사’나 ‘형사 수석 부장’ 또는 ‘법원장’ 등 법관들이 만든 위계질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판사 한 사람 한 사람은 헌법이 친절하게도 손수 그 지위와 권한을 인정해준 헌법기관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지 103조에서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그러니까 저 옛날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나 했음직한 말로 쐐기를 박고 있다. 또 106조는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 한다”는 규정 ─ 보통 회사원이라면 ‘인사규정’에나 있을 법한 것 ─ 까지 헌법전에 직접 출연한다.

이들 조문의 의미는 단순히 폼 재거나 구색을 맞추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데 있다.

법이라는 도구로 통치하는 현대 국가에서 만약 국민이 사법권이 독립하여 행사된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 가장 중요한 전제가 무너져버린다. 법의 힘은 공화국 시민들의 동의와 신뢰에 기초해서만 힘을 가지고, 그 법을 ‘적용’하는 법원에 대한 신뢰 역시 그것이 법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판단이라는 신뢰가 유일한 힘의 원천이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그를 뽑아준 지역구 주민들의 민주적 뜻이 제일 큰 ‘비빌 언덕’이지만, ‘선출되지 않은 권력’ ─ 판사의 힘이 기댈 곳은 바로 이곳, 헌법 5장 밖에는 없다. 그래서 헌법전에 이것을 아로 새기고, 중학교 때부터 죽어라고 외우게 하는 까닭이다.



“어디로부터의 독립인가”

사법권의 독립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동안 늘 접하게 되는 문제는 “어디로부터의 독립인가” 하는 것이다. 주로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초기의 문제의식이었다면, 최근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어느 탈주범의 말로 간추려지는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이 의문시되기도 했다. “사법과 민주주의”라는 법조윤리 단골 의제는 “사법권이 과연 여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는가”를 물어왔다.

그런데 이번 이메일 사건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법원 밖이 아니라 바로 법원 ‘안’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물론 신 대법관이 혼자서 알아서 (낮은 포복 하느라) 그런 일을 했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와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문제가 된 ‘적’은 바로 법원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번 일이 터졌을 때 “아니 그럴 수가!” 하며 놀라는 것보다 “그럴 줄  알았어”라고 혀를 차는 변호사들이 더 많기도 했다. 그러니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유난히 충성심이 깊은 법원장 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용감하고 공정했던 그래서 판사가 된다고 했을 때 내 마음을 든든하게 했던 내 선배와 친구들로 하여금 이런 일을 당연한 것처럼 느끼게 한 법원, 아니 법조 내부의 관료주의와 자기 안의 검열인 것이다.

한편 판사들은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법원에 대한 전반적 불신을 초래하여 어떠한 재판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그 공정성을 의심하게 될 것이라고 많이들 걱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 이를 알리지 말고 법원 내부 절차를 통해서 해결했어야 한다고 후배 판사를 질책하는 사람도 보인다. 판사들뿐이겠는가. 이런 일이 있으면 “법리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통해 해결된다”는 상식에 기댈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점점 더 변호사 말을 안 믿게 되고, 더욱더 전관예우를 받아줄 전관들을 찾게 되어, 가져다 뻐길 ‘전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연수원 출신” 변호사의 앞날도 먹구름이 낀다.
바로 그런 까닭에, 법으로 먹고 사는 이 동네에는 “직업적으로 맺어진 동지”들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것을 금하며, “우리 동업자들의 명예”를 지키고 “우리 법정에 대한 대중의 확신”을 고양해야 한다는 침묵의 규율이 있다(따옴표 안의 말들은 내가 아니라 앨런 더쇼비츠 ─ 보스턴 리걸의 앨런 쇼어가 아니라 ─ 의 말이다).

그러나 당장은 법원에 대한 신뢰가 타격을 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기만 하고 든든한 선례를 만들어놓는다면, 그리고 설혹 또 다른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만들게 된다면, 헌법 속의 ‘법관의 독립’은 중학교 사회 교과서나 저 구름 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눈앞에서 “반짝반짝 눈이 부셔 지지지지지~” 빛나는 진짜 ‘금과옥조(얼마나 이쁜 말인가, 금 科의 옥 條라니!)’가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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