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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08월
  • 2009.08.01
  • 664




가족에서 노사관계로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필리핀의 한국 어학원에서 아홉 명의 교사들이 거의 동시에 사표를 냈다.
자그마치 전체 교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그들 모두 숙련도가 높은 중견 교사들로 어학원의 기둥 노릇을 해온 이들이다.
어학원은 그들 각자에게 단순한 일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서로 위해주는 동료들이 있어 마음만은 편한 둥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꺼번에? 더 좋은 일자리가 손짓해서?
그러면 그 개인들에게도 오죽이나 좋으랴마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사직의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일터가 더 이상 예전의 일터가 아니며,
일터의 변화에 따라 자신들의 애정도 식어버렸다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6월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달 보름날과 말일은 월급날, 아니 한 달에 두 번 있는 임금날이다.
사용자가 시설 보수에 예기치 않은 돈을 지출한 데다 현금을 도둑 맞은 불상사까지 터져
임금 지급이 늦춰질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돌면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걱정한 대로 사용자는 임금을 다음날 지급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교사들이 수업 도중에 교실을 떠나 사무실로 몰려가는 상징적인 집단행동을 했다.
이로 인해 수업이 중단된 시간은 10분 미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임금은 그날 지급되었지만 양 쪽의 감정은 크게 악화되고 말았다.
특히 집단행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교사들과 사용자 사이에 불신의 골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말았다.
도둑을 잡기 위해 설치한 폐쇄회로 TV를 통해 사용자는 집단행동을 주도한 교사의 면면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학원 측은 이들에 대한 압박과 축출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직무규정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날  “1년 전의 일을 기억하시냐?”고 사용자에게 농담을 던진 두 교사도 ‘찍히고’ 말았다.
도대체 1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 때 이곳에선 물난리가 나 학원도 교실까지 침수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그 와중에 사용자가 임금 지급을 미루자 교사들은 수업을 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실력행사로 대응했다.
한 교사는 그날을 “교사들의 중요성과 힘을 보여준 날”로 기억했다.
반면 사용자에게는 고용인들에게 무릎을 꿇은 치욕의 날이자 그들의 단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뼛속까지 절감한 날로 기억되었다.
사용자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당해 수업도 못하고 복구에 구슬땀을 흘리는 상황에서 급료를 며칠 참아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리고 마음으로라도 고용인을 가족같이 여겼던 자신의 태도를 바꾸게 된 데에는 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교사들의 입장은 달랐다. ‘우리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피해복구를 열심히 도왔다.
자기 돈 들여 업체를 불러 청소를 도운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용자는 복구에 필요한 물품은 사들이면서 우리의 생계 수단인 급료 지급은 미루었다’고 항변한다. 
임금 지급을 둘러싼 갈등은 그 후로도 몇 번 반복되었던 것 같다.
임금이 제 날짜에 지급되면 좋으련만 무슨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것인지 딱하기조차 하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교사 쪽에 물었다. 임금을 아주 안 주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늦어지면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고. 집세, 전기요금, 전화요금 같은 다달이 나가야 할 것들이
못 나가니까 힘들단다.
납기를 급료일에서 며칠 여유가 있게 정하면 되는 것 아니냐 했더니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대개 말일에 나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교사들의 사는 형편도 제가끔 달라서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은 벌어서 제 용돈으로 쓰지만 많지 않은 급료로 많은 식구를 부양해야 하는 이들도 있단다.
그래서 가족 중 누구에게 돈 들어갈 일 있으면 임금 받으면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임금이 제때 지급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교사는 임금 지급이 미루어지자 문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되는 바람에 동료들이 식료품을 사주었다는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많은 사람들이 저금이나 비상금도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임금 체불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는 사용자가 고용인을 대하는 일방적인 태도에 있는 것 같다.
사용자는 갈수록 고용인에 대해 통제의 고삐를 단단히 쥐려 한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방침이나 규정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은 고참 교사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말 잘 듣고 급료도 낮은 신참 교사들에게 수업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참 교사들은 어학원에 대한 공헌도와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 시간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는 처우에 대한 실망감, 날로 커져가는 의무와 옥죄어오는 통제에 대한 불만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본급 없이 시간당 급료만을 받으며, 사회보험 혜택도 극소수만 받고 있다.
그래도 예전에는 그나마 교사들의 사무실 출입도 자유로웠고 사용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게시판에 나붙은 차가운 공지문을 통해 전달되고, 권한도 없고 때문에 융통성도 없는 담당 매니저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교사들에게는 답답하고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런 체제를 ‘괴뢰정부’라고 비아냥대며 정들었던 보금자리를 떠나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용자는 말 설고 물 선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 법과 관청도 모자라 고용인들의 눈치까지 보며 사업을 해야 하는 자신을 약자로 보고 있다.
자신도 직장에 다닐 때 노조활동을 했지만 사용자가 되어보니 그때 윗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부모가 되어보니 이제는 곁에 안 계신 부모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은 우리는, 왜 자식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의 자식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없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힘을 더 가진 것처럼 보이는 쪽이 도리어 더 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방어에 급급한 동안 노사가 함께 타고 있는 배는 균형을 잃고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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