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8월 2009-08-01   1594

참여사회가 눈여겨본 일_공정무역을 다시 생각하다: 공정무역, 스스로 삶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서로 돕는 길




공정무역,
스스로 삶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서로 돕는 길


김기섭 두레생협


대항해시대에 탐험가들이 선교사를 태우고 아시아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헤집고 다닌 것처럼, 지금은 유력한 민간투자은행과 다국적기업이 IMF와 세계은행과 미국정부를 등에 업고 세계 각지를 탐색하고 다닌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탐색의 목적은 황금을 모으기 위해서다.



시장의 세계화와 자유무역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재화의 자유로운 이동과 시장을 통한 가격결정이 인간에게 부(富)를 가져다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제한된 경우에만 유효한 유토피아다. 자유무역과 시장경제가 부를 가져다주는 지역과 사람들이 있다면, 전혀 그렇지 못한 지역과 사람들도 있다.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시장의 세계화와 자유무역으로 인해,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은 분배의 불공정, 열악한 노동 환경, 인권 탄압, 지역 분쟁, 환경 파괴 등과 같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시스템 미적용 단계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부작용쯤으로 여기는 것은 기만이다. 정부개발 원조라는 명목으로 몇 푼 집어주는 것, 또한 가진 자의 오만이고 불공정한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시장 시스템과 정부의 개입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3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만도 없다. 세계는 이제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오늘의 제3세계 문제는 내일 우리 삶에 대한 위협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편드는 일이고, 그렇다고 시장에게 자제를 요청하자니 구박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용과 방식이야 어떻든 구체적인 행동이다.



공정무역, ‘원조’가 아닌 ‘교역’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으로 ‘인도주의적 원조 활동’이 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분쟁과 자연 재해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오늘을 넘길 수 있는 생필품과 의약품이다. 지금 당장의 절박함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이 행동의 역할은 매우 크다. 정치적 견해를 떠나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는 폭넓은 보편성 또한 이 행동이 지니는 강점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정치사회적 연대 활동’이다. 이는 인도주의적 원조 활동보다는 좀더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제3세계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분쟁과 재해는, 실은 그 사회가 지니는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회의 구조적 변혁 없이 재해나 기아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행동을 낳게 하는 문제의식이다. 물질적 지원을 넘어, 해당 국가에 대한 압력과 국제 사회에서의 여론 형성을 통해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사회 변혁을 이끌어낸다는 측면에서 이 행동의 역할은 매우 크다. 제3세계와 보다 농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또한 이 행동이 지니는 강점이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지원 활동과 정치사회적 연대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 긴급 구조로 절박한 생존의 위협을 넘기고, 제도의 변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지만 대자본들의 자유무역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절박한 상황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방적 원조가 아닌 쌍방을 이롭게 하면서, 동시에 제3세계 생산자들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자립을 촉진시키는 상시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여러 나라 민간단체들의 지원으로 학교를 지었지만, 정작 그 학교에 아이를 보낼 수 있을 경제력을 지니지 못한 네팔의 한 여성은 말한다. “그냥 주는 건 싫어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않고는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요. 원조가 아닌 교역이 필요해요.”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공정무역’이다. 공정무역은, 제3세계를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세 번째 연대의 방식이다.



노동자, 노예를 넘어 농민이 되다


필리핀 네그로스 섬은 세계 시장에 수출되는 이 나라 설탕 총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곳이다. 쌀과 고구마를 화전으로 일구고 멧돼지와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원주민의 섬에 16세기 스페인 탐험가가 찾아와 그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중반, 이 섬에 새로운 정착민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그들은 원주민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사탕수수 대규모 농장으로 만들었고, 이를 설탕으로 가공하여 외국에 수출했다. 아시엔다(hicienda)로 불리는 대토지 소유제 하에서, 원주민들은 더 이상 농민이 아닌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동자였고 대지주 설탕 귀족의 노예였다.

1980년대 중반, 네그로스는 심각한 기아에 직면했다. 국제 설탕 시세가 수직 폭락하자 농장주들은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고, 연이어 불어 닥친 가뭄과 태풍은 네그로스의 농업생산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몇 년간에 걸친 만성적인 영양실조 속에서, 연약한 아이들이 첫 희생자가 되었다. 네그로스의 실태가 외국에까지 알려지자 세계 곳곳에서 인도적 지원이 쇄도했다. 국제적 원조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고, 기아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기아가 수그러들자 사람들의 관심도 네그로스에서 멀어졌고, 주민들은 다시 사탕수수 대농장의 노동자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대농장의 노동자로 돌아갔다 해서 이전의 노동자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가뭄과 태풍이 기아를 가중시키기는 했어도, 기아의 근본 원인은 대토지 소유제와 모노컬처라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있음을 깨달았다. 섬 인구의 2%도 안 되는 사람들이 섬 전체 경지면적의 70%를 소유하고, 사탕수수 단일작물에만 의존하여 정작 자신이 먹을 식량은 외부에 의존해야만 하는 구조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했다.

네그로스 주민들은 중앙정부에 토지개혁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농장주들과의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인도적 지원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민간단체들이 네그로스로부터 떠나갔지만, 몇몇 단체는 끝까지 남아 이 싸움에 동참했다. 그들은 네그로스 주민들을 위해 여론을 형성하고 외교적 압력을 행사했으며, 나아가 토지 취득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네그로스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이를 지원하는 제1세계 민간단체의 정치사회적 연대 활동은, 대지주가 지배하는 필리핀 정부로 하여금 1987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네그로스의 사람들에게 노동자와 노예에서 농민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사탕수수만 보고자란 사람들은 자기 땅에 무엇을 경작해야 할지, 분할 받은 토지에 대한 원금과 이자를 어떻게 납부해야 할지 몰랐다. 곳곳에서 농지를 다시 대지주에게 반납하고 노동자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농민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농사에 필요한 종자와 농기구와 카라바오(물소)를 장만하기에는 그들의 힘만으로는 너무 버거웠다. 아시엔다의 노동자에서 자립하는 농민으로 나아가는 길은, 긴급한 기아 대책이나 정치사회적 제도 변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자립적인 농민으로의 경제력을 확보할 또 한 번의 연대가 필요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사탕수수 재배만큼은 자신 있었다. 더욱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사탕수수의 제당방법은, 풍부한 미네랄이 함유된 건강에도 좋은 것이었다. 두레생협의 첫 공정무역 제품인 마스코바도 설탕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마스코바도 설탕을 계기로 네그로스의 농민들은 인도주의적 지원이나 정치사회적 연대의 대상에서 평등한 파트너로 변모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하루 세 끼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보내며, 한 해 한 벌 정도의 새 옷을 장만하고 싶다는 그들의 희망을 이루게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공정무역을 공정한 무역에만 머무르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마스코바도 설탕이 네그로스 농민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기는 했지만, 사탕수수 재배에만 몰두하여 정작 자신이 먹을 식량은 외부에 의존한다든가 사탕수수의 생산자에게만 경제력 향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공정무역의 본래 취지에 맞지 않았다. 자급을 위한 재배 품목의 다양화가 필요했고, 네그로스의 다른 생산자들과의 연대도 필요했다. 이는 공정무역을 하면서도 공정한 무역을 넘어서는 행동이었고, 이 행동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연대가 필요했다.

공정무역을 넘어서는 데 필요한 자금은, 두레생협 소비자들이 설탕 한 봉지를 구입하면서 추가로 기부하는 ‘교류기금’으로 마련되었다. 이 기금은 생산자 조직에게 무상으로 전달됐고, 이 기금이 모체가 되어 ‘소생산자 공동체의 생산성 및 여성 참여 증진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다. 마을 공동의 우물 조성, 여성 건강 센터의 건립, 벼농사를 위한 관개 시스템의 설치, 곡물 건조를 위한 태양 건조기 설치, 유축복합영농을 위한 닭과 염소의 보급, 농지가 부족한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재봉틀과 원단 구입 등, 2006년부터 시작하여 3년째를 맞이하는 이 프로젝트 덕분에, 사탕수수 생산자들은 품목의 다양화를 통한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갔고, 사탕수수 이외의 농민들에게도 경제력 향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설탕의 섬 네그로스가 공정무역을 넘어 농업과 지역의 자립을 향해가는 진정한 역사는, 이제야 비로소 출발점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생산자의 주체적이고 자립적 삶 이뤄져야

공정무역의 목적은, 제3세계와 제1세계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나아가 지속적인 교역을 통해 제3세계 생산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촉진시키는 데 있었다. 원조가 아닌 무역을 통해 생산자에게는 자립의 기반을, 또 소비자에게는 안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평등한 호혜의 관계다. 그러나 이런 공정무역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공정무역에는 넘어서야 할 과제 또한 존재한다.

먼저, 공정무역은 ‘무역 지상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무역은 모든 생산물을 상품으로 만들며, 상품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분업을 세계적으로 확대시킨다. 공정무역에서 취급하는 대부분의 제품들 역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구축된 국제 분업과 상품 생산 체제의 결과물이다. 공정무역이 물품의 교역에 머물 때, 공정무역은 지금의 체제에 대해 어떤 대안도 될 수 없다.

공정무역에서의 물품 교역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공정무역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자립적인 삶을 이루면서, 동시에 서로 평등하게 상호 의존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한다. 그렇기에 공정무역은 세계적 차원의 상품 무역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폐쇄적 지역자립을 지양한다. 폐쇄적 자립은 필연적으로 고립과 지배를 낳는다. 진정한 자립은 평등한 의존 속에만 이루어진다.

다음으로, 공정무역이 넘어서야 할 과제는 ‘공정무역 지상주의’다. 공정무역이 교역의 대상으로 삼는 물품이나 생산자는 한정되어 있다. “공정무역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처럼 공정무역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대관절 어쩌란 말이냐?”는 대다수 제3세계 농민의 목소리를, 공정무역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공정무역의 품목과 교역량을 무작정 늘리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이는 시장의 논리를 공정무역 내부로 끌어들이고, 경제사회적 대외의존도를 높이며, 지역의 자원 순환 관계를 파괴할 우려가 있다.

공정무역이 제한적인 교역을 통해 제한적으로밖에는 관계하지 못하면서도, 그 제한성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로 향해 가기 위해서는 무역이 아닌 또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무역과는 별개로 진행하는 사회개발 프로젝트다. 사회개발 프로젝트의 대상은 교역하는 제품과 생산자에게만 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 협동하며 자립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행해진다. 공정무역은 무역을 넘어 사회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단계에서 비로소 그 목적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공정무역은 착한소비가 아닌 겸허함과 친교

마지막으로, 공정무역은 ‘소비 지상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공정무역이 성립할 수 있는 힘은, 공정무역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이해와 구매로부터 나온다. 불공정한 자유무역 상품을 거부하고, 조금은 값이 비싸더라도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가 있기 때문에 공정무역은 유지 발전할 수 있다. 소비가 지니는 힘은 21세기 인류의 중요한 발견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비의 힘은 생산과는 유리된 대중소비 사회이기 때문에 나타난 권력이다. 아무리 착하고 윤리적인 소비라 할지라도 대중소비 사회에서의 소비는 어느 것 하나 생산하지 않는 소비일 뿐이다. 소비를 착하고 윤리적인 것으로 조직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생산을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산하는 데 있다. 공정무역을 통해 제3세계에 구현하려는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삶은, 제3세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제품을 이용하는 제1세계에서부터 행해야 할 일이다.

교역(trade)이란 본래 ‘지나간 발자국(track)을 걷는(tread)’ 것이다. 물건을 매매하는 행위가 교역의 중심이 아니다. 교역의 중심은 그곳에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만나 친교를 이루어야 하는 데 있다. 동시에 우리는 좋은 것이라 생각하여 행한 일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다는 신념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그릇된 결과를 나을 수도 있다는 겸허함이다. 소비가 지니는 힘은 매우 크지만, 동시에 물건 뒤에 숨겨진 관계의 회복과 그 과정에서의 겸허함은 소비가 갖추어야 할 기본조건이다. 공정무역은 이제 서구의 윤리관과 운동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 <참여사회> 8월호 잡지에 실린 제목을 변경합니다

‘물고기 잡는 법’ 알려줘 스스로 삶의 기반 마련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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