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 2020-10-05   674

[역사]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길옥화 선생님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길옥화 선생님

 

9월 초,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정부가 7년 전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전교조의 법외노조 처분이 위법함을 최종 판결함으로써 재판부가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 했던 사법적 결정이 매조졌다. 따져보면 전교조가 출범한 1989년 이후 전교조가 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보호 아래 있었던 시간은 그중 절반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결성 초기, 군사 정권하에 발생한 1,500여 명 선생님들의 해직사태, 그리고 그 과정에 당시 학생이었던 김수경1972~1990, 심광보1972~1990, 김철수1973~1991의 희생이 있었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도 지난했던 해직 교사들의 여러 복직 투쟁 가운데 소중한 한 선생님을 잃어야 했던 일을 여러 이유로 알려진 바가 없다. 

 

오늘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전교조 탈퇴 후 복직’이라는 조건을 내건 정부와 조직의 결정에 끝내 수긍할 수 없었던 그 젊은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1993년 9월 26일 새벽, 춘천의 13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몸으로 발견되었다. 서른한 해를 갓 넘긴 짧은 삶.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을 그녀가 죽음을 택한 날은 전교조 탈퇴각서 제출 시한 이틀 전이었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호 (통권 279호)

故 길옥화 선생님

 

아이들 앞에 떳떳하고 싶었던 국어 교사

고향 원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던 국립대에 입학해, 졸업하자마자 서울 중화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어도 8년이 흐른 후 같은 학교에 발령되고서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그녀의 학과 동기이자 동료 남자 교사의 증언, 학생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해 활동하던 동기들과 달리 조용히 공부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여자 동기의 증언, 그리고 죽음 뒤 그녀가 고교 시절 친했던 동창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기록 등을 통해 그녀가 임용 당시만 해도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홀로 감내하던 평범한 교사였음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신양중학교 동료 여교사의 추모 글에는 그와는 상반된 다른 기억들이 담겨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만으로 하얀 볼을 쉽게 붉혔다는 내용과 함께, 한 학급의 아이들을 일주일에 다섯 시간이나 만나는 국어 교사임에도 늘 수업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하던 모습, 학교에서 찍혀 학급 담임을 맡지 못했고 아이들과 종종 단합대회를 가지던 다른 담임교사를 몹시도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적혀있다. 

 

그녀는 여러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옮겨서도 평교사 협의회 활동을 이어나갔고, 동시에 교장이나 교감이 아끼고 걱정하는 새내기 국어 교사이기도 했다. 내성적이거나 새침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질문하는 이였고, 집회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학과 동기들의 어깨를 사내처럼 ‘야!’ 하고 툭 치고 지나가는 활력 있고 단단한 사람이었다고 동료 교사들은 증언하기도 했다. 

키보드도 복사기도 없던 시절, 신양중학교로 옮겨서도 학생들과 하나하나 손으로 써 가며 문집을 만들었고, 1989년 6월 16일 신양중학교 학생부실에서 개최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신양중학교 분회결성식’에서는 자신의 손글씨로 결성 선언문을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돌아가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이 아플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지 두어 달 뒤, 그녀는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된 1,490여 명의 교사 중 하나가 되었다. 중학교 국어 교사로 5년을 지냈고, 이후 4년을 해직교사로 지낸 셈이었다. 서울동북부지회의 지회보 <올푸름>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지만, 늘 그래왔듯이 그녀의 삶은 조직으로부터는 조금 거리를 둔 것이었다.

 

복직을 기다리면서도 고향의 노모에게는 내색 하나 없이 뒤늦게 얻은 번역 일로 생계를 버텼다. 지하 셋방에 사느라 늘 볕에 서는 것을 좋아했으며, 어렵게 만든 돈으로 조카의 백일 선물을 사고는 뛸 듯이 기뻐했던 이 젊은 해직 교사에게, 홀로 견뎌야 했던 삶의 무게보다 더 힘든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요식 행위일 뿐인 탈퇴각서를 쓰는 것이었다. 순수한 교육운동에 복직을 가지고 거래하자고 나오고, 아이들 교육과는 상관없는 불온한 이념집단으로 몰아대는 것에 대해 그녀는 분노와 모욕감을 참지 못했다. 

 

그녀가 숨지고 난 이틀 뒤 1,419명의 교사가 복직을 신청했고, 그중 1,328명이 오랜 기간에 걸쳐 복직했다. 그녀를 기억하는 한 동료 교사는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흔들리는 동료 해직교사들을 붙잡아 놓으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정해숙 당시 전교조위원장은 조사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멈칫하다 이내 “침묵하겠습니다” 라며 터져오는 슬픔을 안으로 가뒀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4년의 정년을 남겨둔 국어 선생님. 법 테두리 밖으로 쫓겨나길 거듭한 전교조의 곤경에는 어떤 힘을 넌지시 보탰을까? 비정규직 교사의 일괄 정규직화를 반대했던 3년 전 전교조의 성명에는 어떤 곤혹스러움을 느꼈을까? 무엇보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없는 풍경이 일상이 된 학교에서 그녀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가닿으려 했을까? 생전에 그녀가 즐겨 불렀다는 노래 <한계령>의 노랫말처럼 짧게 스쳐간 그녀의 삶에 덧없는 질문들이 멈추질 않는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호 (통권 279호)

길옥화 교사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신양중학교 앞, 학교 관계자들이 교문을 굳게 닫은 채 노제 행렬의 진입을 막아서고 있다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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