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7월 2008-06-30   2323

특집_유가 폭등이 미치는 영향: 암울했던 석유파동에 대한 기억

암울했던 석유파동에 대한 기억

맹행일 참여연대 회원 him805@hanmail.net

2004년에 배럴당 40달러를 넘어선 원유가가 작년 초에 50달러를 넘더니, 올해 2월 100달러를 5월에는 130달러를 돌파했다. 산유국의 한정된 생산량에 비해 수요가 급증한 데다 국제투기자본의 가세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다른 석유파동을 맞은 상태다. 지난 반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겪은 석유파동을 교훈 삼아 되돌아보자.

석유파동의 발자취

이 나라 헌정을 중단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1972년 10월유신과 1973년 1월 중화학공업 추진 발표 이후 1년도 안 된 그 해 10월에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중동의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미국을 비롯한 친이스라엘 국가들에게 석유수출을 금지시키는 석유무기화, 석유 생산량 감축 및 OPEC를 통한 원유값 인상을 발표한다. 이로부터 약 1년반 동안이 제1차 석유파동이다.

정부는 12월에 최규하 씨를 중동에 특사로 보내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아랍 정책을 발표하고 사우디 국왕과 쿠웨이트 국왕을 만나 석유구걸외교를 펼친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OPEC 고시가격을 보면 1973년 1월 1일 배럴당 2.591달러하던 것이 중동전쟁이 일어난 10월 1일자로 5.119달러로 그리고 1974년 1월 1일자로 11.651달러가 되었으니 불과 1년 사이에 4배가 뛴 셈이다. 따라서 국내 석유값 인상은 물론 그에 따라 생필품값이 올라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 사이에 도매물가가 100%나 올랐다.

당시 나는 울산석유화학공단 한국합성고무(금호석유화학)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공장은 준공 및 시운전을 끝내고 본격생산에 들어간 상태였으나, 예상 외로 수요가 떨어져 창고에 제품이 산더미같이 쌓였다. 정부의 10% 유류소비억제를 위한 규제 강화로 시내에 상가는 일찍 문을 닫고, 시내버스나 노선버스 배차간격이 늘어나 추운데도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던 일, 또한 네온사인이나 가로등을 꺼버려 밤이 되면 시가지가 칠흑같은 어둠으로 변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뿐인가. 보일러가 서버린 산부인과 병원에서 산모와 아기가 새파랗게 추위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회사 사택 난방은 주로 연탄이었는데, 사재기 바람에 연탄이 품귀상태가 되어 웃돈을 주어도 연탄 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1974년 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 형식으로 긴급조치3호를 발표하는데, 유류절약을 비롯한 에너지대책, 긴축재정정책과 물가대책 외에 중소상공업자, 영세민 농어민 등의 소득증대와 생활안정, 근로자 해고 방지와 임금체불 방지를 위한 대책 등이 포함되어 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석유파동은 1978년 일단 진정되었으나 그 해 말 이란의 국내 혼란과 1979년 초의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다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세계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점하고 있던 이란은 석유의 전면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고, 여기에 석유업자들의 매점매석과 투기성 시장조작까지 횡행하면서 국제 석유시장은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1980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는 기준원유가도 30달러대를 돌파했으며 1981년 10월 34달러 선에서 단일화되어, 1978년의 12.70달러에서 무려 2.7배나 오른 가격이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는 제1차 석유파동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 하락과 소비자 물가의 급상승 등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에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경제성장율 74년 8.0%, 80년 7.1%),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경제성장율 79년 6.4%, 80년 -5.7%). 이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 체질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중심의 확대정책에 중점을 둔 것과 1979년 10월에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신군부의 군사쿠데타에 이은 제5공화국 탄생 사이의 국정 혼란 등에 기인한다.

제2차 석유파동

당시 나는 여천석유화학공단 금호화학(주) 페놀·아세톤공장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979년 연말 준공목표 공사가 본사의 자금난으로 기자재 반입이 지연되어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몇 달 뒤 어렵게 공사를 재개하여 공장을 준공했으나, 세계적인 불경기로 국내외 수요가 위축되어 공장 가동률은 50% 정도에 그치고, 판매가도 떨어져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누적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가동 초창기에 입은 큰 손실을 만회하지 못하고 그룹차원의 구조조정으로 회사는 금호석유에 합병되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의 관리자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당시 이러한 구조조정의 회오리는 나라 전체의 산업에 걸쳐 불어닥쳤는데, 예를 들면, 1980년 8월 국보위가 결의한 자동차통폐합조치로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대우)로 이원화되고 기아·아시아·동아·신진 등 4개사가 전문자동차공장으로 통폐합되었고, 그 밖에도 방위산업체, 언론기관, 연구기관 등이 과잉투자라는 이름으로 통폐합이 되어 많은 근로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석유 위기 극복하려면 검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IEA 통계에 나타난 2007년 각 나라의 에너지 효율(TOE/1000달러)은 한국이 0.339인데 비해 미국은 0.213, 영국은 0.144, 일본은 0.106, OECD평균 0.195이다. 따라서 한국은 똑같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데 일본에 비해 3배, 미국의 1.5배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셈이다. 이는 한국이 화학, 철강, 비금속 등 자원을 많이 쓰는 산업이 주력산업이라는 게 주요 원인이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거나 운송 등의 분야에서도 원단위가 높아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앞으로 우리도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처럼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한국은 에너지 빈국이라 소요에너지의 97%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강력한 에너지 절감정책은 물론 재생가능에너지체제로의 전환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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