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3월 2008-02-11   295

[참여마당_삶의 길목에서] 삶의 속도


삶의 속도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gojinayo@hanmail.net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허름한 차림새의 이주노동자들이나 가무잡잡한 피부의 이주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며칠 전이었다. 방학 중인 아이들을 데리고 모처럼 가까운 공공도서관에 나들이 가는 길에 잠깐 농협에 들렀다. 인구가 2,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면이라 금융 창구는 대체로 한산하기 때문에 나만 얼른 일을 보고 올 속셈으로 아이들은 차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창구 한 곳에만 여직원이 앉아 있었는데 웬걸, 예닐곱 명이 그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작업복 차림으로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들은 어느 공장에서 통장을 만들러 나온 이주노동자 일행이었다. 외국인의 통장 개설은 내국인보다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여직원은 한참 동안이나 노동자들이 적어온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데 열중해 있었다. 차에서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이 찾아와 “엄마, 왜 이렇게 안 와?” “무슨 일이야?” 하고 소곤소곤 물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 마침내 통장 개설이 모두 끝나자 이들을 인솔하고 나온 한국인 감독처럼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많이 기다리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라며 절을 하고 나갔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조바심을 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다른 손님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것은 차라리 작은 놀라움이었다. 

얼마 전 다른 농협의 하나로 마트에서 겪은 일. 밖에서 일을 보고 저녁시간이 다 되어 귀가 길에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들른 참이었다. 서둘러 돌아가 저녁 지을 생각에 몇 가지 물건만 집어 들고 재빠르게 계산대로 갔는데, 젊은 여자 손님이 내 앞에서 계산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의 구입 품목은 간단했지만 예기치 못했던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딘지 어눌한 말씨와 서툰 발음에 눈길을 돌려 바라보니 동남아 새댁이었다. 시어머니의 카드를 들고 왔는데 오늘 구입한 금액을 적립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카드 정보를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중년여성 계산원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그녀에게 이것저것 꼼꼼하게 물어본 뒤에야 안 될 성싶었는지 “다음에 영수증을 가져와 적립하라.”고 말해주고 계산을 끝냈다. 그러느라 5분쯤 더 흘러갔을 것이다. 처음엔 느긋하고 친절한 계산원을 존경과 감탄에 가까운 눈길로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슬며시 애가 탔다. ‘그쯤 했으면 됐지, 너무 질질 끄는 것 아냐?’하고 속으로 투덜대기도 했다. 계산원 못지않게 새댁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당황해하거나 위축된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뻔뻔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자연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들 앞에서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약간의 지연에도 조바심을 내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나,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촌각을 다투는 내 삶의 속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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