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0월 1999-10-01   379

분단극복과 국제연대에 집중해야

21세기 한 국 시민운동언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 "시민"에 대한 개념정립. 노동운동과의 연대, 분단극복, 시민운동의 지구화 등 몇가지의 쟁점을 가지고 유럽과 비교해 21세기 시민운동의 화두를 던져본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로 시민운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나 시민운동을 단어로서 뿐만 아니라, 이를 표방한 수많은 조직과 단체가 등장했고 이들은 환경과 여성문제는 물론 소비자운동, 인권운동, 건강, 교육, 과학기술문제 등 현대사회가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나름대로 씨름해왔다.

사실 ‘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 귀에 아주 친숙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도시라는 생활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대략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새겨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민, 부산시민 하는 식으로 우리는 늘 말하고 또 들어왔다. 조금 예외적이라면 광주항쟁때 무자비한 계엄군에 대항해 총을 들었던 시민군을 우리는 기억해낼 수 있다.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과 불의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높은 도덕성이 남긴 흔적은 따라서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시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서구에서도 ‘시민’은 사실 우리처럼 도시라는 생활공간 속에 사는 사람 정도로 이해됐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대충 국가시민 또는 국민으로 이해되다가 20세기 들어서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시민에 대한 이해 속에도 서구에서 보인 시민에 대한 이해변천과도 비슷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국가시민 또는 국민이라는 시민에 대한 일방적 이해는 특히 일제식민 치하에서 특징적이었는데 몇 년전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한 이유도 바로 천황제 국가를 중심에 둔 국민개념이 안고 있는 문제의 지적으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노동과 자본사이의 모순관계를 기본으로 시민사회를 이해했던 마르크스적인 시민이해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한국적 조건 속에서 70년대부터는 민중이라는 특수한 주체개념이 창출되었으나 이러한 개념이나 실제가 시민의 그것과 어떻게 달리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한 채 최근에는 시민에 의해 흡수 또는 대치된 것마냥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민중은 이제 정말 용도폐기된 것인가? 아니면 시민운동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음미돼야 하는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시민사회가 아니라 경제사회 관점에 서 있는 민중의 이해로부터는 사실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성장의 동격이자 동시에 희생양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이 70년대에는 변혁과 이를 위한 저항의 주체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비국가적-비경제적인 조직과 연합이 자발적인 동의에 기초해서 사람의 세계를 개선 또는 변화시키려는 시민운동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 당시에는 결여된 상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가시화된, 축적된 부의 분배효과는 87년 6월항쟁과 같은 정치적 영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동자를 중심으로한 민중과 소위 넥타이부대라는 시민사이에도 갈등의 조짐이 나타났고, 일부에서는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시도도 끊임없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68년 운동’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운동인 노동운동과의 연결에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사회운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생태계, 여성, 외국인, 교육, 주거문제 등에 눈을 돌려 녹색당으로 발전해 오늘에 와서는 집권연정에 참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지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민주당이 현대화의 기치를 내세우고 전통적인 복지정책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어려운 줄타리를 하고 있고, 녹색당은 녹색당대로 생태계 보호와 복지사회 방어를 결합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와는 달리 전통적 사회운동의 정치세력화는 물론 새로운 사회운동을 표방하는 시민운동의 기초 역시 약한 우리의 어려운 조건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을 ‘소시민적’이라고 폄하하거나 노동운동과 같은 전통적 의미로서의 사회운동의 장래를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는 식의 비관적인 태도로는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모두가 같이 힘든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얼마전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에 거세게 항의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독일TV에도 비친 적이 있는데 국가와 자본이 노동에 대한 공세를 계속 강화하는 조건에서 시민운동의 노동운동에 대한 연대는 앞으로 무게있는 관건이 될것이다.

시민운동과 분단극복 시민사회가 주로 비경제적-비국가적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이 문제는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성 구축을 위해서도 비판적인 음미가 중요하지만 우리의 분단문제와 관련해서도 특별한 검토를 요하고 있다.

남한 경제사회 모순의 핵심을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이론적 전통에 서 있는 북한의 관점에서는 공해, 여성, 소비자보호운동 같은 시민운동이 지역적이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보일 수 있고, 때로는 ‘외세-자주’라는 근본적 모순을 호도하고 있다고까지 볼 수 있다. 반대로 남한의 시민운동 입장에서 볼 때는 시민운동 부재의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다. 통일 이전의 독일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보였는데 동독의 공해를 문제제기해서 환경도서관을 운영했던 저항세력에 대한 동독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은 물론, 동독체제를 공공연히 거론, 비판한 서독의 시민운동단체나 녹색당과 동독당국과의 갈등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따라서 남한의 시민운동이 통일문제에 대해 소극적일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북의 체제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로 대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의 현실에는 ‘인민’과 ‘시민’의 이해 사이에 심한 편차가 놓여 있는데, ‘인민’이 당과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대상이나 수단이라는 비판적인 인식이 있고 또 시민의 건강한 측면보다는 이의 이기적이고 타락한 모습이 먼저 눈에 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 반세기동안 남북에서 각각 구축된 경협체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이러한 ‘인민’이나 ‘시민’에 대한 이해 편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분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의 시민운동이 갖는 자발성과 공개성은 바로 이러한 극단적 상호불신을 넘어서서 진실된 남북상호이해를 확충시킬 수 있다고 보인다. 이미 경실련 안의 통일분과위원회같은 조직들이 시민운동과 통일운동의 접촉점을 확충시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접촉점이 한반도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는 동서냉전이 종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냉전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특수한 정치·군사적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코소보사태에서 보았듯이 반전·평화운동의 열기도 현재 상당히 식어 있고, 가령 동서독 사이의 긴장완화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뿌리깊은 종교도 없는 상황속에서 시민운동이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노력은 더욱 요청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의 지구화

‘노동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의 시민운동은 노동세계와 연대해야 되고 민족통일문제를 붙들고 씨름해야 되는 어려운 과제들을 안고 있다. 그러면서도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지구촌 속에서 세계시민(Gloval Citizenship)의 한 부분으로서 다른 나라나 지역의 시민운동과 연대를 강화해야만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현재 약 5만여 NGO들이 전세계에서 다양한 문제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의 강점은 역시 전문가적인 합리성보다는 자발성에 의거한 도덕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얼마전 버클리대학에 들렀을 때 대학근처 상가에서 우리의 북소리가 요란하기에 가봤더니 고국 브랜드 GAP이 괌에서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생산하는 것에 항의하는 연대시위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열린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발적으로 형성된 조그마한 정치(Subpolitics)가 지구촌 안에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종래 민족국가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어온 정치개념을 바꾸고 있는데 이러한 조그마한 정치의 강점은 역시 중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지구적 차원에서 실천에 옮기는 연결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한의 시민운동단체들이 국제연대사업에 여러 가지 형태로 참여하고 있지만 이 지구적 연결망에 더욱 적극적으로 연동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민운동의 장래를 담보하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은 이렇게 우리 사회의 특수한 구조속에서 제기된 문제와 함께 지구촌의 보편적인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온 정치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부터 우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운명은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강제성에 담겨 있다”는 울리히 벡의 이야기도 결국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송두율 배를린대학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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