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4월 2015-04-02   4984

[만남] 배제된 자, 호모 사케르 – 이평호 회원

배제된 자,
호모 사케르

이평호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사진 Nina ahn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시설’은 진정 먼 곳에 있다. 우리는 그곳이 제아무리 가까워도 ‘여기here’라고 부르지 못하고 ‘거기there’라고만 부를 수 있다. 누군가 시설에 입소한다는 것은 어떤 어둠 속으로, 어떤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고병권, 『살아가겠다』 중에서


그를 만나기 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비장애인의 기준이라는 자각에서였다. 실수하지 않을까, 문제가 될 만한 질문은 없나, 자기검열은 멈출 줄 몰랐다. 그를 만난 후 생각은 더 많아졌다. 나의 생각은 한참동안 ‘시설’에 머물다 ‘장애’라는 단어 깊숙이 들어갔다가 ‘정상성’의 개념과 범주를 거쳐 ‘추방과 배제’를 지나 정의로워야 할 ‘제도’와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우리’의 역할로까지 이어졌다. 아, 글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글을, 그의 이야기를 쉽게 써낼 자신이 없다.

 

생명으로 태어나다

 

“1973년 무주에서 태어났어요. 당시만 해도 집에서 출산을 많이 했고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출산하는 도중 한동안 산도에 머리가 끼어 있었고, 목에 탯줄을 감은 채 태어났다고 해요. 그 과정에서 뇌에 전달되는 산소가 부족해져 결국 장애를 갖게 됐죠.”
세상에 태어나 그가 가장 먼저 갖게 된 이름, 뇌병변 장애(뇌성마비).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걸 막으려는 배려일까, 그가 자신의 장애를 가지고 농담을 한다.
“근데 뇌 손상 범위가 좀 넓어서 장애가 럭셔리하게 생겼죠. 하하하.”
그의 농담을 의학적으로 풀면 ‘중증장애’가 된다. 그가 앉아 있는 전동휠체어의 복잡한 장치들이 ‘중증’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제가 유난히 약하고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보이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병원에 데려가셨어요.  의사는 병명(뇌성마비 중 강직성 사지마비)만 알려주고는 잘 보호해주라고 그랬대요.”
그의 부모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눈길을 헤치고 먼 곳의 병원들을 찾아갔고 효험이 있다는 온갖 약을 사 먹였다. 도회지의 물을 먹이면 나을지 모른다는 황당한 얘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이사까지 했다. 그는 엄마 결혼반지를 자신이 해먹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근육 강직 때문에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긴장하면 정도가 심해져서 몸이 더 말을 안 듣죠.”
그의 농담을 농담으로 되갚았다. 그건 비장애인도 마찬가지예요, 하하하.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발음은 상당히 정확했다. 단어 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허공을 휘휘 젓고 있는 그의 두 팔을 보며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들였을 노력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가 절 업어 키우셨죠. 어렸을 땐 동네 형들이 리어카에 절 태우고 놀러 다니기도 했고. 하루는 동네 반장님이 취학통지서를 들고 저희 집에 왔는데 거기다 대고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얘는 장애가 있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 말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세발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골목을 내다보았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그도 가고 싶었다. 그가 학교에 가지 못한 건 가난이나 장애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배울 능력이 없다는 것, 그의 무능은 가족의 고백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최종 승인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결국 ‘장애’는 사회가 그에게 할당한 ‘역할’일 뿐이었다.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32살, 방문턱을 넘다

 

“틈만 나면 사람들은 절 재활원에 보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삼육재활원이 유명했는데 거긴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빈자리가 나려면 누가 나가든가  죽든가 그것밖엔 방법이 없는 거죠.”
재활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곳은 일종의 수용 시설이었다. 아버지 등에 업혀 상담을 받으러 가던 날, 엄마는 그곳에 가면 멋진 구두를 한 켤레 사 주겠다고 하셨다. 걷지 못하는 그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는 늘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막고 나섰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결국 시설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세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회전의자에 앉아 발끝으로 방바닥을 밀어야 움직일 수 있는 그에게 세상은, 우주는, 작은 방 한 칸으로 수렴되었다. 그의 회전의자는 몇 센티 되지도 않는 방문턱 앞에서 멈춰 섰고, 그는 너무도 쉽게 그 안에 갇혀버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하루 종일 TV만 보며 지냈어요. 그러다 화면에 나오는 자막과 사람들의 말소리를 연결시켜가며 글을 깨쳤죠. 동생들이 보던 만화책과 위인전을 읽을 수 있게 돼서 너무 좋았어요.”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는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2004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중증장애인들에게 보급해준 전동휠체어 중 한 대가 그의 몫이 되고, 그 휠체어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32년. 방문턱 앞에서 세상을 포기해야 했던 꼬마는 어느덧 32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복지관에 물어보니 우리 동네(안양)에는 장애인 모임이 없더라고요. 수소문 끝에 노원구에 장애인모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가보니까 장애인들이 술도 마시고, 우와, 정말 좋더라고요.”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활동보조인도 없이 혼자 4시간씩 전철을 타고 소변을 12시간 이상 참아야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는 행복했다. 자신의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전동휠체어’라 답했다. 장애인에게 ‘이동’은 곧 ‘생존’이다.

 

자립의 꿈을 향하여

 

“모임을 통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장애인들을 만났어요. 그들을 보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어쩌면 나도 자립할 수 있지 않을까….”
자립을 위해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싶어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주위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불가능하다고.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을 그는 1년 만에 모두 해내고 마침내 대학교 입학 자격증을 따냈다.
“그즈음 사촌형에게 연락이 왔어요. 아는 목사님이 시설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제 부모님도 연로하시고 하니 그 시설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시설에 들어가는 건 죽을 만큼 싫었어요. ‘꽃동네’ 같은 곳도 막상 가보면 그냥 큰 방 하나에 장애인 여럿을 수용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시설에 들어가는 건 공포 그 자체죠.”
시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보호라는 이름의 감금이다. 가족들이 더이상 버티기 힘들 때, 장애인은 사실상 시설 입소를 강요받는다.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시설 문제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인간의 권리와 특권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는 권력구조 자체다.

 

“시설에 가지 않겠다,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자, 말 안 들을 거면 집에서 나가라고 하더군요. 당장 머물 곳을 찾아야 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마포에 있는 ‘한벗둥지(장애인 단기 거주시설)’에 머물게 되었고, 1년 후엔 천안에 있는 나사렛대학 재활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 어렵사리 직장을 구했고(현재 그는 ‘아이디어마켓’이란 회사에서 일상생활용품들을 설계, 디자인 한다) 작은 아파트를 얻어 자립의 꿈도 이루었다. 집안에만 있던 장애인 소년이 서른 살이 넘어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을 얻고, 자립의 꿈을 이루기까지, 그곳엔 그의 노력과 더불어 그를 도와주었던 ‘깨알 천사’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어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이 사회가 정작 저의 장애를 문제 삼는 바람에 그 꿈을 이루진 못했어요. 그래도 언젠간 내가 노력하고 공부해서 얻은 이 모든 것들을 같은 장애인 동료들을 위해 쓰고 싶어요.” 
그가 파일에 차곡차곡 정리해둔 온갖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각종 합격증, 장학증서, 특허를 낸 제품, 장애인 활동보조기구에 대한 아이디어…. 이 세상은 그를 추방했으나 그는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라 욕구가 멈춘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라 말한 자크 랑시에르가 떠올랐다. 그러나 장애인 개인의 욕구와 의지를 들먹이기에 세상은 너무도 부조리하지 않은가.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장애를 가진 건 이 세상이다

 

“정부지원이 있어도 대부분의 중증장애인은 수백만 원이 넘는 전동휠체어 구입을 엄두도 못내요. 또 중증장애인들이 자립하려면 무엇보다 그들의 일상을 돌봐줄 활동보조인 제도가 현실에 맞게 고쳐져야 하죠. 현재 가족과 지내는 경우는 160시간 정도, 혼자 지내는 경우에는 300시간이 좀 넘게 활동 보조를 제공해 줘요. 보조를 받으려면 가족과 사는 걸 포기해야 하는 거죠. 자립을 해서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으려면 집도 있어야 하고 생계비도 있어야 하는데, 이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장애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가 앉아 있는 방석만 해도 60만 원짜리다. 그 방석 덕분에 척추측만증이 심한 그도 하루에 18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부담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시설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1년에 대형장애인수용시설의 장애인 1인당 지원 금액이 천오백 만원이 넘어요. 그 돈을 시설이 아니라 장애인에게 직접 제공한다면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 해도 자립해서 살지 못할 이유가 있겠어요?”
그가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자립을 꿈꾸었던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시설로 보내질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여행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비장애인들이 누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이제 현실이 된 그 꿈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여전히 위태롭기만 하다. 
“일반 시민으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세월호 집회에도 참석했고요, 시민단체에서 하는 대중강좌도 들으러 다니죠. 기부도 하고, 나의 정치적 성향을 세상에 표현도 하며 살고 있어요. 그리고 장애인 동료들에게 뭔가 기여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할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

 

장애란 어떤 본래성을 가진 게 아니다.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순간 할 수 없음, 즉 장애를 경험한다. 다시 말해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활동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삶 속에서 내가 발견해 낸 것은 ‘삶의 불가능’이 아니라 ‘체제의 불가능’이었다.

 

 

나는 안다는 일이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해, 안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중에서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많이 아팠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 이 글의 곳곳엔 고병권의 『살아가겠다』에 나오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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