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3월 2015-03-02   3341

[통인] 이 가수야 말로, 진짜 동네가수 – 재즈뮤지션 말로

 

이 가수야 말로, 진짜 동네가수

재즈뮤지션 말로

 

글   박상규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5년 3월호 (통권 220호)

 

어쩌자고 봄은 다시 오는 걸까. 꽃피는 봄에 떠난 자식은 기별이 없건만, 다시 저 남쪽에서 새봄의 바람이 불어오다니. 기막힌 세월이다. 우리는 이 봄을 온전히 건널 수 있을까?

입춘 다음날인 2월 5일 오후였다. 재즈 가수 말로(본명 정수월)가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박물관 지하 1층 전통문화공연장 무대에 섰다. 노래는 목이 아닌 가슴으로 불러야 멀리 퍼져나간다. 어떤 노래는 두 눈을 감아야만 부를 수 있다. 말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노래 <잊지 말아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를 잊지 말아요

다시 4월이 올 거예요 

나를 잊지 말아요

다시 4월이 올 거예요 

남쪽바다 멀리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 

노래하며 올게요 

나 철부지 종달새 되어….”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로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면,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없을 듯했다. 

“아휴… 죽는 줄 알았어요. 손문상 화백이 만든 <잊지 말아요> 영상이 나오면서 노래를 시작했는데, 앞에 앉으신 유가족분이 얼마나 우시는지. 눈을 뜨면 우는 게 보이잖아요. 감정을 추슬러 눈 감고, 고개 숙인 채 아무것도 안 보고 오직 이 노래를 끝까지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불렀죠.”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집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콘서트 현장은 그렇게 무대 위의 인내와 객석의 눈물로 시작됐다. 엿새가 지난 2월 11일 오후 서울 은평구에 있는 북카페 물푸레에서 말로를 만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가끔 노래를 부르고, 마을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아이를 돌본다. 알고 보니, 그녀는 ‘동네가수’였다. 1995년 저멀리 미국 보스턴 버클리 음대Berklee College of Music에서 공부한 적 있는 동네가수. 부산 사투리 억양을 가진 허스키한 목소리의 재즈 가수 말로는 북한산 아래 한 마을에서 ‘재즈 정신’을 성실히 구현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동네에서 주로 활약하는 재즈 가수. 외롭지는 않을까?

“왜 외롭죠? 저는 세계화, 그런 걸 싫어해요. 왜 세계화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뭐 할건데? 돈, 명예?”

 

동네가수의 객기일까, 아니면 철학일까. 

“(예술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이 꿈을 가질 때 ‘번화한 곳에서 내 재능을 마음껏 펼치리라’ 이렇게 생각해요. 좋죠. 그런 꿈이 있어야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순간이 와요. ‘그래서 뭘 할 것인가’. 저에겐 그게 화두였어요. 모든 뮤지션들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으려 미국 뉴욕으로 간다면, 그 외 지역의 사람들은 고품질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러 다 뉴욕으로 가야 하나?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뮤지션이 내한공연을 하죠. 근데, 티켓값이 30만 원이에요. 그 돈 내고 봐야 하나? 그런식으로 문화를 즐겨야 하나? 그렇게만 돼서는 안 되죠. 

비행기 타고 뉴욕으로 가지 않아도, 서울 신촌으로, 홍익대학교 앞으로 가지 않아도, 자기 집에서 몇 걸음으로 닿는 동네 클럽에서 좋은 음악 들을 수 있으면 좋잖아요. 클럽에서 직접 음악을 들으면, 음반으로 듣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실제로 뮤지션이 연주하는 걸 옆에서 보면 그를 온전히 다 느낄 수 있어요. 그런 게 뮤지션이 노래하고, 연주하는 목적이거든요. 자기를 받아들여달라는 적극적 몸짓인데, 그런 기회를 (마을에서) 잡아가는 거죠. 그래야 사는 맛도 있고, 진짜 따뜻한 게 뭔지 알고. 

왜 다들 세계로 나아가려할까. 바로 옆 사람이 재즈가 뭔지 모르는데, 왜 세계적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려고 할까. 그냥 동네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자.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이런 마을 활동을 하는 거죠.”

 

참여사회 2015년 3월호 (통권 220호)

“비행기 타고 뉴욕으로 가지 않아도, 서울 신촌으로, 홍익대학교 앞으로 가지 않아도, 자기 집에서 몇 걸음으로 닿는 동네 클럽에서 좋은 음악 들을 수 있으면 좋잖아요. 바로 옆 사람이 재즈가 뭔지 모르는데, 왜 세계적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려고 할까. 그냥 동네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자.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이런 마을 활동을 하는 거죠.”

 

그렇다고 말로가 동네에서만 활동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이미 6개의 앨범을 냈다. 가수 배호의 노래와 옛 가요를 재해석한 두 장의 앨범도 발표했다.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친다. 그녀는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노래를 굉장히 잘 하셨어요. 두 분이 가톨릭 신자인데, 성가대 활동을 하시다 만나 결혼했죠. 아버지가 음악을 시키려고 피아노를 가르치셨어요(말로는 3녀1남 중 셋째다). 큰언니는 지금 클래식을 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자주 ‘피아노 한 번 쳐봐’ 하셨어요. 그럼 여자애들 셋이서 화음 넣고, 음악하면서 놀았죠.”

 

어린시절부터 집에서 노래책 펴놓고 노래하는 게 말로의 놀이였다. 그런 그녀가 대학에서는 의외로 물리학을 전공했다. 애초 그녀의 꿈은 가수가 아닌 천문학자였다. 

“우리나라 교육의 폐해죠! (웃음)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조금이라도 가르쳤으면 물리학에 대한 의문을 해소했을 거예요. 그땐 지구과학, 생물, 화학, 물리 중 두 과목을 선택해야 했는데, 학교에서 물리와 지구과학을 아예 선택하지 못하게 했어요.” 

 

천문학자를 꿈꾸는 학생에겐 재앙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들은 제가 음악을 잘 하니까, 그걸 하라고 했어요. 근데 음악은 학교에서 안 가르쳐줘도 잘 했잖아요. 물리는 학교에서 안 가르치니까 알고 싶더라고요. 대학에서 굳이 뭘 배워야 한다면 물리학, 천문학을 하겠다고 생각했죠.”

 

운명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 걸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일하는 천문학자의 꿈은 오히려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접어야했다. 

“저는 물리를 굉장히 잘 할 줄 알았는데, 저보다 훨씬 뛰어난 애들을 보고 ‘아, 나는 물리를 못하는 구나’하고 깨달았죠.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직관적으로 풀어내는 굉장히 뛰어난 친구들이 있잖아요. 그에 비하면 저는 문제 푸는 방식이 지리멸렬했죠.”

 

물리 문제는 직관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말로. 하지만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 곧바로 악보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악보를 보면 어떤 노래도 막힘없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 앞에 재즈라는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재즈를 딱 들었는데, 악보에 표기를 못 하겠더라고요. 리듬이 몇 번째 박자에 들어오고, 4분 음표인지 8분 음표인지도 모르겠고, 코드도 잘 모르겠고. 좌절을 한 거죠. 똑같은 노래를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게 부르고. 그때 재즈클럽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미국인 연주자에게 ‘재즈를 어디서 배워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미국의 기관(학교)을 알려주더라고요. 그런데 학비 등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음악을 좀 한다는 말로를 좌절시킨 재즈. 물리 과목의 부재가 대학 물리학과를 선택하게 했듯이, 그 좌절이 그녀를 재즈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재즈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과 만만치 않은 비용 사이에서 고민하던 말로는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렸다. 

“내가 음악을 잘 하는지 공인을 받아보고 싶었어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은상을 받았어요.(자작곡   <그루터기>) ‘아, 영 못하지는 않는구나’하고 조금 믿음을 가졌죠. 그래서 과감히 미국 버클리 음대로 갔죠.”

 

1995년 미국으로 간 말로는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변 사람들은 학위를 따서 돌아오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재즈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재즈 가수 활동에 돌입했다. 궁금하면 참지 못하고, 그게 해소되면 다른 길을 모색하는 말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떨까. 

“학생들에게 ‘노래가 너에게 뭐니?’라고 항상 물어요. 고교에서 쫓기듯이 대학에 들어온 경우가 많거든요. 점수가 안 돼서 노래하고, 그냥 노래가 막무가내로 좋아서 하고, 목소리가 좋아서 하고…. 여러 학생이 있죠. 그런데 정작 음악이란 게 뭔지, 우린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냥 부르고 끝이었죠. 

모든 예술에서는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이 돼야 해요. 어느 순간엔 그걸 딛고 앞으로 나가거든요. 그게 없으면 그냥 기술에 머무는 거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는데, 학생들이 힘들어하죠. 어떤 친구들은 울기도 하고, 왜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내느냐, 그냥 발성을 어떻게 내는지만 알려 달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도 학기가 지나면 좀 변해요. 그냥 노래만 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걸 기다리는 거죠.” 

 

참여사회 2015년 3월호 (통권 220호)

 

말로의 6집 앨범 <겨울 그리고 봄>은 작년 11월 세상에 나왔다. 이 앨범에는 세월호 추모곡인 <잊지 말아요> <제 자리로>가 담겼다. 재즈 앨범에 담긴 추모곡. 언뜻 보면 어색해 보이지만, 그녀에겐 재즈-사회참여-일상이 분리돼 있지 않다. 

“제 아이가 올해 10살이에요. 동네에서 공동육아를 해보니, 내 아이만 예쁜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다 예뻐요. 내 아이가 잘 살려면 또래 친구들도 건강하고, 주변 토대가 잘 마련돼야 한다는 걸 알았죠. 아이는 같이 키우는 거고, 저 역시 사회에 신세를 지는 거예요.”

 

내 아이는 사회가 키우고, 나 역시 다른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깨달음. 세월호 사건 이후, 길에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저도 아이를 키우잖아요. (눈물) 남의 일 같지가 않더라고요. 몇 달 동안 무기력하게 살았죠. 음악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싶었고. (작사를 하는) 이주엽씨도 애가 둘 있는데, 그 분이 글을 써서 줬어요. 그 가사를 보자마자 또 펑펑 울었죠. 사흘 만에 곡을 만들었는데, 뭔가 맺혀 있던 게 줄줄 풀린 거죠.”

 

참여사회 2015년 3월호 (통권 220호)

 

세월호 추모곡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수없이 변주되는 재즈. 말로는 ‘사회참여’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일상을 설명하지 않았다. 노래를 잘하니 이웃 앞에 섰고, 내 아이가 예쁘니 다른 아이들도 사랑스럽다고 했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건 너무 식상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걸 알려고 노력하겠죠.(웃음) 아, 지난 2년 동안 북한산초등학교에서 제가 원해서 1,2학년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거든요. 직접 건반 치고, 노래 불러주고. 애들이 건반 소리를 듣더니 ‘선생님 지금 그거 치는 거 맞아요? 뭐 틀어 놓은 거 아니에요?’라고 묻는 거예요.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면 소리가 난다는 걸 몰랐던 거죠. 지금까지 mp3파일로만 음악을 들었으니까요. 3학년 아이들부터는 직접 오디션을 봐서 합창단도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화음을 맞춰보더니 좋아하더라고요. 올해는 그 아이들과 합창을 하는 것, 이거 하나는 확실한 계획이네요.”

 

‘동네가수’를 가진 그녀의 이웃이 부러웠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나는 동네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그런 봄이 또 오고 있다. 

 

 

박상규
얼마 전까지 오마이뉴스 기자였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은 백수지만,
여전히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다. 곧 지리산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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