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10월 2015-10-02   4082

[특집] 청소년의 참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청소년의 참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글. 쥬리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

 

최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는 현재 만 19세 이상에게만 보장되고 있는 선거권을 만 18세부터 보장하는 방향으로 선거연령 하향을 논의 중이다. 이번뿐 아니라 작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선거연령을 하향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왔다. 새누리당과 우파 소수정당들을 제외한 정당들은 만 18세, 혹은 그보다 낮은 연령대의 선거권 보장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선거연령 하향을 주장하는 논의들은 제도권 안팎에서 이루어져 온 셈이다.

 

선거에 참여할 만큼 ‘성숙한’ 나이?
만 18세로 선거연령을 하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진보적인)대중의 감성도 어느 정도는 호의적이다. 만 18세, 그러니까 연나이로 치면 19세나 20세 정도면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적은 나이의 사람들에게도 선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떨까? 선거권이 보장되어도 좋을 만큼 ‘성숙한’ 연령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테지만, 대개는 청소년의 보다 전면적인 참정권 보장에 반대 의견을 갖거나 의문을 품을 것이다.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해 논할 때 사람(어른)들은, 과연 청소년이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투표할 수 있을까, 주변 여론에 휩쓸리거나 포퓰리즘에 놀아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청소년은 세금도 안 내고 일도 하지 않으므로 선거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기도 한다.

정치참여는 이 사회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결정 과정에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참정권이 보장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결정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인 1표를 동등하게 행사하는 보통선거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결정에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정치참여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떤 신분이어야 한다거나, 얼마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거나, 어느 정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정권의 역사를 돌아보면, 재산 가진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보장되던 시절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인간은 정치참여를 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며 재산권을 행사할 재산이 없으므로 정치참여를 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여겨졌다. 그 시절에는 세금을 납부하는 중산층 이상의 남성만이 정치참여를 할 만한 ‘시민적 성숙’을 갖췄다고 전제되었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의 상식은 여성은 판단력이 부족하고 미성숙하므로 정치참여의 자질이 없다는 것이었다(여자들은 남편 따라 투표할 것이다!).

 

청소년의 목소리는 비청소년이 대변할 수 없다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청소년이 정치에 대해서 무얼 알겠느냐, 관심이나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한다.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정치를 자기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정치참여가 쉽지 않은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무관심해지고, 정치적 힘이 없으니 시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져서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더 적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의 삶의 조건 중에 정치의 결과물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입시경쟁과 열악한 학생인권, 가정 내 학대, 부모에의 경제적 종속, 청소년을 하대하는 사회 분위기는 모두 정치의 결과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청소년의 삶에서 ‘강제 야자(야간 자율학습)’의 문제는 노동착취나 장시간 노동의 문제만큼 중요하고, 입시경쟁의 문제는 비정규직, 고용불안 문제만큼 중요하며, 가정 내 학대 문제는 강력범죄의 문제만큼 중요하다(그리고 청소년 중에는 임금노동을 하고 있거나 할 예정인 사람이 다수이므로 여타 문제에서도 당사자이다).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의 의미는 이러한 청소년 삶의 문제들이 정치적인 문제로 공론화되고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진 의제로 부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청소년 집단의 정치적 세력화가 이루어진 후에 이러한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다루어지는 방식은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입시경쟁 문제는 청소년 당사자보다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공론화되어 왔다. 사교육비 지출에 대한 부담이 큰 학부모의 입장에서 학교가 실시하는 강제야자는 오좋은 정책으로 인식되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의 영유아 학대나 학교의 ‘심한’ 체벌은 학부모의 공분을 사지만 ‘가벼운’ 체벌은 자기 자녀를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용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혹자는 청소년 삶의 문제들은 이미 비청소년들이 대리하여 정치의 장에서 해결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약자의 이익을 강자 집단이 대신 챙겨주는 일은 역사적으로 전무하다. 청소년의 입장으로 문제를 대신 말해줄 수 있는 비청소년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청소년의 이해와 비청소년의 이해가 달라지는 문제들에 대해서 청소년의 목소리는 결코 비청소년에 의해 대변될 수 없다.

 

참여사회 2015년 10월호 (통권 227호)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참정권을?
OECD국가 중 한국과 일본만이 만 18세 선거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일본도 최근 18세부터 선거권을 보장하도록 법이 바뀌었으니 이제 한국만 남은 셈이다. 만 18세 선거권은 한국에서도 그리 먼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써 청소년의 정치참여가 완전히 보장되기엔 청소년 중 만 18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낮다. 개인적으로, 나이를 이유로 참정권을 부정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이 제한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기권표가 너무 많아진다거나, 투표율과 유효표를 계산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들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충분히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이고, 모든 구성원에게 참정권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포기해야할 만큼 새로운 선거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라 본다. 하지만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여타 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현실과 합의하며 벌여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에, 운동의 전략으로 특정 나이에게 선거권을 보장하라는 슬로건을 내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어느 시위에서 보았던 피켓 중 하나는 ‘흑인 참정권 1870년, 여성 참정권 1928년, 청소년 참정권 몇 년?’이라는 문구를 담고 있었다. 청소년의 참정권은 과연 언제 보장될까? 청소년 참정권을 위한 여정에 당신이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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